茶 한잔 詩 한수 풍류가 흐르는 세상사 쉼표… 영남 정자문화 일번지 함양 화림동 계곡
입력 2010-11-03 17:25
한양의 선비들은 왜 험준한 육십령 고개를 넘어 화림동 계곡을 찾았을까? 영남의 정자문화 일번지로 불리는 함양 화림동 계곡으로 가려면 육십령을 넘어야 한다. 남덕유산 아랫자락을 타고 넘는 육십령(734m)은 덕유산과 지리산 사이에 위치한 백두대간 고개. 옛날 산적이 들끓어 육십명이 모여야 고개를 넘을 수 있다고 해 육십령이라고도 하고, 고갯길이 육십구비라 육십령이라고도 하는 험한 고개였다.
지금은 대전통영고속도로를 타고 육십령터널을 순식간에 통과하지만 조선시대 선비처럼 유람하는 운치를 맛보려면 육십령을 넘어야 한다. 백두대간을 타고 남하한 단풍은 시나브로 육십령을 넘어 금천 상류인 화림동 계곡을 울긋불긋 수놓고 있다. 덕유산에서 발원한 금천은 백두대간 아래 첫 마을인 경남 함양의 서상면과 서하면 60리를 흐르며 계곡에 기이한 모양의 바위와 소를 빚어놓았다. 너무 투명해 초록빛을 띠는 계류는 여인의 피부처럼 매끄러운 화강암 반석을 미끄러지듯 흐르다 곳곳에 선녀탕 같은 소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어김없이 정자가 들어앉아 자연을 벗한다.
그 계곡이 절정을 이루는 곳이 화림동(花林洞)이다. 본래 화림동 계곡은 팔담팔정(八潭八亭)이라고 해서 여덟 개의 소와 여덟 개의 정자로 유명했다. 그러나 네 개는 사라지고 거연정, 군자정, 동호정, 농월정이 전해왔으나 안타깝게도 2003년 방화로 농월정마저 소실됐다.
화림동 계곡에서 첫 번째로 만나는 정자는 거연정(居然亭). 정면 3칸에 측면 2칸으로 팔정 중 으뜸으로 꼽히는 거연정은 중추부사를 지낸 전시숙이 소요하던 곳으로 후손 전재학 등이 1872년에 세웠다. 화림동 계곡의 여느 정자와 달리 거연정은 화림교라는 구름다리를 건너야 만날 수 있다. 팽나무 물푸레나무 등 수령 300년이 넘는 고목의 단풍잎 사이로 보이는 거연정은 한 폭의 그림. 봉전마을 앞을 흐르는 남천의 커다란 자연석 위에 주춧돌을 세우고 네 모서리를 떠받치는 활주로 극적인 균형미와 조형미를 조화시켰다. 깊이를 알 수 없는 푸른 소에는 단풍잎이 둥둥 떠다니며 시심을 자극한다.
군자정(君子亭)은 화림동 계곡의 여느 정자와 달리 계곡에서 한 발 물러나 있다. 영귀대라는 너럭바위에 세워진 군자정은 자연을 정자 안으로 끌어들이면서 자연의 일부로 승화시킨 것이 특징. 조선의 5현으로 꼽히는 일두 정여창 선생이 안의현감으로 있을 때 이곳을 찾아 시를 읊자 군자가 유람한 곳이라 하여 전세걸이라는 선비가 세웠다.
화림동 계곡의 다른 정자와 달리 동호정(東湖亭)은 단풍처럼 고운 단청이 채색되어 있다. 동호정은 동호 장만리가 관직에서 물러난 뒤 유영하던 곳으로 후손이 1890년에 건립했다. 장만리는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로 피난하자 임금을 등에 업고 수십 리를 달렸던 인물. 정면 3칸에 측면 2칸으로 노송에 둘러싸인 동호정은 정자 건축문화의 대범성을 보여준다. 대들보는 마름질을 하지 않은 통나무로 뒤틀려진 나무 모양을 그대로 살렸다. 누대에 오르는 계단은 통나무를 반으로 잘라 도끼로 툭툭 찍어 만들었다. 정교하지는 않지만 울퉁불퉁한 계단이 균형을 이루고 나무의 질감이 그대로 살아 투박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동호정 앞에 섬처럼 생긴 너럭바위는 해를 가릴 정도로 넓은 바위라는 뜻의 차일암(遮日岩). 길이 60m에 넓이가 40m쯤 되는 차일암은 조선시대 선비들의 유원지로 이름 높았다.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수항의 셋째 아들인 삼연 김창흡은 차일암을 보고 ‘넓은 반석에는 천 명이나 앉을 수 있고 큰 바위엔 악기를 백 개나 매달 수 있네’라고 읊었다. 한양의 선비들이 기생을 대동하고 차일암을 비롯한 화림동 계곡의 너럭바위에서 탁족도 즐기고 유희도 즐겼다는 말이 빈말은 아닌 모양이다. 화림동 계곡의 마지막 정자였던 농월정(弄月亭)은 월연암(月淵岩)이라는 드넓은 너럭바위에 있었다. 눈이 부시도록 하얀 월연암 곳곳에는 바위가 움푹 들어간 웅덩이가 있다. 이층누각이었던 농월정은 관찰사와 예조참판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던 지족당 박명부가 1637년에 처음 세웠다. 농월정이 있던 오른쪽 너럭바위에는 웅혼하고 유려한 글씨체로 ‘지족당이 지팡이 짚고 신을 끌던 곳’이라는 뜻의 지족당장구지소(知足堂杖?之所)라는 글씨가 깊게 새겨져 있다. 장구란 지팡이와 신을 뜻하는 말로 산책을 의미한다. 화림동의 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달과 교감하는 이곳에 남명 조식 선생이 시 한 수 남기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푸른 봉우리 우뚝 솟고 물은 쪽빛인데/숨은 명승 많이 취해도 탐욕은 아니리/이 잡으며 어찌 굳이 세상사를 말하리/산수를 이야기해도 할 말이 많을 텐데”
산청 덕산에 산천재를 짓고 살던 남명 조식 선생은 51세 되던 해 여름에 제자들과 함께 화림동 계곡의 월연암을 찾아 시 한 수를 남겼다. 이나 잡고 사는 옹색한 처지이나 산천초목을 벗삼아 명리를 버리고 은거하는 자신의 삶을 노래한 것이다. 요즘 사람이라고 옛 선비의 음풍농월을 모를 리 없다. 비록 농월정은 화마에 사라졌지만 깊어가는 가을을 맞아 농월정 주변의 풍치를 가슴에 새기고픈 관광객들로 계곡은 쓸쓸하지 않다. 조선의 선비들은 왜 화림동 계곡을 좋아했을까? 화림동은 다른 계곡과 달리 물은 풍부하지만 대부분 너럭바위를 타고 미끄러지기 때문에 물소리가 시끄럽지 않다. 소나무 가지 사이로 빠져나오는 바람소리와 부드러운 물소리가 어울려 시심을 자극한다고나 할까.
함양의 선비들이 굳이 화림동 계곡에 정자를 짓고 한양을 비롯한 전국의 선비들이 육십령을 넘어 화림동 계곡을 찾은 까닭이리라.
함양=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