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승만 (5) 일제말 학도보국대로 끌려가 강제노동

입력 2010-11-03 17:38


요즘도 초여름 햇살이 따사로울 때면 냇가를 뛰어다니며 개구리를 잡던 기억이 떠오른다. 한가롭던 어린 시절의 추억인가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이 기억 속 나는 열네 살이었다.



1944년 형의 뒤를 따라 평안공업학교에 입학했지만 일제 말기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학교 수업은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못했다. 얼마 안 돼 수업은 전면 중단됐고 학생들은 모두 ‘학도보국대’로 끌려가게 됐다.

가족을 두고 떠나야 했던 첫 번째 경험이었다. 당시 아버지는 일본 경찰을 피해 숨어 다니셨고 어머니는 어린 동생들을 돌보며 그 뒷바라지를 하시느라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셨다. 그런 마당에 집을 떠나는 것도 안타까웠지만 곧 처하게 된 현실도 심각했다.

학도보국대는 학교별로 조직된 노동부대로 군수공장이나 토목공사장에 투입됐다. 나와 친구들은 평안북도 안주의 군사비행장 건설장으로 갔다. 제대로 된 장비 하나 없이 삽과 괭이를 번갈아 사용하며 흙을 파내고, 파낸 흙을 등에 지고 날랐다.

나중에 아들을 키울 때 열서넛 된 아이의 팔과 등을 새삼스럽게 쓰다듬어 본 일이 있었다. 아직 여리고 낭창낭창한 뼈와 말랑말랑한 살을 쥐어보면서 학도보국대 시절의 내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짐작해 본 것이다.

과도한 노동량만 문제가 아니었다. 위생시설이 전무한 숙소와 적은 양의 끼니는 어린 학생들을 과로와 영양실조, 합병증 등으로 푹푹 쓰러지게 만들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짬 날 때마다 스스로 무엇이든 찾아 먹어야 했다.

친구들과 휴식 시간마다 산으로 들어가 아카시아 꽃을 훑어 먹고, 논가의 개구리를 잡아 구워 먹었다. 초여름 햇빛을 받으러 논둑에 나왔던 개구리들이 유독 기억에 남는 것은 그 개구리를 잡아야 내가 산다는 절박함이 그 장면 속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1년 가까이 지나서야 공사가 끝났고 집으로 돌려보내졌다. 꿈에도 그리던 집이고 고향인데 돌아가 보니 녹록하지 않은 삶은 마찬가지였다.

일제 말기에 교회 지도자들이 겪은 핍박은 다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다. 우리말로 성경을 가르치다 잡혀간 주일학교 교사들이 몇몇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고, 목사님이 잡혀간 빈 강단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성도들의 모습은 교회마다 흔한 풍경이었다.

내가 다니던 서문밖교회에도 형사들이 쳐들어와 우리말 찬송가에 먹칠을 하며 부르지 못하게 하고, 설교 내용을 적으며 설교자를 위협하는 일이 빈번했다. 이를 바라보는 내 안에는 일본인에 대한 분노와 울분이 서서히 차올랐다.

그럴수록 금지된 것에 대한 열망은 더 커졌다. 대표적인 것이 찬송가 ‘내 주는 강한 성이요’였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라는 찬송을 몰래 외워 교인들과 부를 때면 억눌렸던 신앙의 용기가 고개를 들곤 했다.

1945년 8월이 다가왔다. 이때쯤 나는 집안살림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철도국 기사로 근무하던 형과 어머니는 아버지 뒷바라지를 위해 집을 떠나 있는 일이 많았다. 남동생 승규와 여동생 세 명은 다들 어렸기에 내가 책임지고 먹여야 했는데 문제는 양식이 없다는 것이었다. 빈 쌀독을 들여다보며 한숨을 지을 때면 “학도보국대에 있을 때는 집에만 오면 고생 끝이려니 했는데…” 하는 혼잣말이 절로 나왔다.

그런데다 폭격기가 온다고 사이렌이 하루에 몇 번씩 울리더니 급기야 폭격이 시작됐다. 사람들은 피란을 위해 평양을 떠나기 시작했다. 동리 반장도 피란을 가라고 권했다. 그러나 동생 넷을 데리고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그런 가운데 15일이 됐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