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황주리] 11월에 듣는 노래

입력 2010-11-02 17:49


11월은 한 해 중 가장 쓸쓸한 달입니다. 시도 때도 없이 우울합니다. 게다가 저는 갱년기가 시작되는 오십대 중반에 들어서는 참 추운 나이입니다.

그 시기를 겪은, 저보다 나이 많은 어른들은 이렇게 말씀하시네요. 계절이 바뀌면 바뀌나보다 생각하고, 우울하면 펑펑 울고, 텔레비전 앞에 앉아 아무 생각 없이 드라마를 계속 보라고요. 그러면 기분이 많이 나아진다나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은 절대 하지 말래요. 아무 생각 없이 텔레비전 앞에 앉아 드라마를 봅니다.

11월은 드라마를 보기에 아주 좋은 시간입니다. 오늘은 ‘자이언트’를 보았어요. 드라마 속의 애달픈 사랑이 너무 슬퍼서 펑펑 울었답니다. 어이가 없었어요. 왜 그렇게 눈물이 나는 건지.

드라마의 배경이 80년대, 우리가 스무 살의 청춘병을 앓던 바로 그 시절이어서일까요? 아마도 그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들 중의 많은 분은 7080세대일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고문을 당하는 장면도 눈물이 나고, 하다못해 악역들의 모습마저 그리운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참 묘한 드라마더군요.

11월엔 지나간 노래들이 그립습니다. 올해로 팔순이 되신 우리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던 노래는 70년대 후반 인기 절정이던 ‘김훈과 트리퍼스’가 부른 ‘정주고 내가 우네’라는 노래였어요. 지금도 가끔 어머니는 물으십니다. 가수 김훈은 요새 뭐 하냐고요. “참 잘 생긴 가수였는데” 하시면서요. 저는 가끔 어머니를 위해 김훈의 노래를 들려드린답니다. 오래된 컴퓨터에다 듣고 싶은 노래를 클릭하면 다 나오거든요, 흘러간 노래들을 낡은 컴퓨터로 듣는 기분도 쏠쏠하답니다. 나는 가끔 어머니의 디스크 자키가 되곤 합니다.

그러고 보니 이대 앞 다방에서 우리에게 음악을 틀어주던 디스크 자키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빅토리아다방에서 제가 신청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을 틀어주던 긴 머리를 질끈 묶은, 지적으로 보이던 언니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 궁금해져요. 우리들의 인연은 그렇게 스쳐 지나갑니다. 다시 만난다 해도 서로는 서로를 몰라보고 스쳐 지나가겠지요.

어머니는 와인 한 잔을 하면서 제게 또 음악을 틀라고 하세요. 윤항기의 ‘별이 빛나는 밤에’, 위키리의 ‘종이배’, 조영남의 ‘딜라일라’, 양희은의 ‘한계령’, 윤형주의 ‘우리들의 이야기’, 김민기의 ‘작은 연못’, 송창식의 ‘사랑’, 사월과오월의 ‘옛사랑’, 박인희의 ‘목마와 숙녀’, 박형준의 ‘첫사랑 언덕’…. 사실 이중 대부분은 제가 좋아하는 노래들이고요. 어머니는 다시 ‘김훈과 트리퍼스’를 틀어달라고 하시네요. 그 다음 신청곡은 JK김동욱의 ‘미련한 사랑’이지요. 김훈 이후엔 김동욱이 최고래요.

저는 어머니의 디스크 자키가 되는 일이 행복합니다. 11월엔 매일 디스크 자키를 하고 싶어요. 오래 전에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는 참 미남이셨어요. 어머니는 11월 이 쓸쓸한 밤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리며 김훈의 ‘정주고 내가 우네’를 들으십니다. 문득 아버지가 많이 그리워지는 2010년 11월입니다.

황주리(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