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박병광] 中 지도부의 역사인식과 시대정신
입력 2010-11-02 17:52
‘시대정신’이란 말이 있다. 이는 독일의 철학자 헤르더(Herder)가 처음으로 사용한 이래 괴테(Goethe)를 거쳐 헤겔(Hegel)에 이르러 역사적 과정과 결합한 보편적 정서, 민족정신과 결부된 현대적 개념으로 정착됐다. 협의적 측면에서 볼 때 국가지도자는 당시의 시대정신을 구현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시대정신이 지도자를 선택하며 성공한 지도자는 시대정신을 잘 이해하고 구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광의적 측면에서 볼 때 시대정신은 국민이 공통으로 지향하는 가치와 더불어 국가가 지향해야 할 가치규범이 함께 녹아들어야 한다. 즉 시대정신은 각 나라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하는 것이다. 가령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일본 총리는 일본의 우파 의견을 대변해 신사참배를 강행하고 군비증강을 시도하면서 한국과 중국 등의 반발을 사고 국제사회에서 외톨이가 됐다. 일본 내 시대정신을 반영했을지 몰라도 국제사회에 도도히 흐르는 시대정신은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던 것이다.
최근 중국의 차기 최고 지도자로 확실시되는 시진핑(習近平) 부주석의 한국전쟁 관련 발언을 두고 비판이 지속되고 있다. 시 부주석은 지난달 25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한국전쟁 참전 60주년 기념 좌담회에서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은 평화를 지키고 침략에 맞선 정의로운 전쟁이었다”면서 “세계 평화와 인류 진보를 지켜낸 위대한 승리”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한·미 양국에서 비판이 거세게 일자 중국 외교부가 다시 정례 브리핑에서 “시진핑 부주석의 발언은 중국 정부의 정론(定論)을 대변한 것”이라고 못 박고 나섰다.
사실에 무지한 시진핑 발언
시 부주석의 주장은 중공군의 참전을 정당화하고 참전 노병들을 격려하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중요한 몇 가지를 호도하고 있다는 데 문제의 핵심이 있다. 첫째, “침략에 맞선 위대한 정의의 전쟁”이란 말은 국제사회의 상식과는 거리가 멀다. 특히 “침략에 맞섰다”는 것은 한국이 먼저 침공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이는 북한군의 선제 무력 남침을 “평화의 파괴행위”로 규정한 당시 유엔 결의문에도 위배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역사적 사료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김일성이 스탈린과 마오쩌둥(毛澤東)의 승인 하에 기습 남침으로 시작됐다는 한국전쟁의 역사적 진실을 호도하고 있다.
둘째, “제국주의 침략자가 중국 인민에게 강요한 전쟁”이라면서 “침략자가 조·중 국경의 압록강과 투먼강을 압박하고 비행기를 출동시켜 동북 변경도시와 마을들을 폭격했다”고 주장한 것도 진실을 왜곡한 것이다. 미군은 유엔 결의에 따라 16개국의 일원으로 참전했다. 더욱이 압록강을 넘어 중국까지 공격한 것도 아닌데 ‘미국의 침략’을 거론하는 것은 한국전쟁 참전을 합리화하기 위한 마오쩌둥의 아전인수식 해석을 반복한 것에 불과하다.
셋째, 결과적으로 중국의 참전은 유엔 결의와 국제사회 규범을 무시하고 북한의 침략전쟁을 도와준 것이기 때문에 ‘정의의 전쟁’이 아니라 부끄럽고 정당성을 잃은 전쟁이다. 때문에 한국전쟁의 진실이 밝혀지면서 북한의 침략을 인정한 러시아는 물론이고 중국마저도 자국 교과서에서 ‘북침설’을 ‘남북한 간의 내전’이라고 고쳐 쓰지 않았던가.
성공한 지도자 될지 의문
오늘날 개혁개방의 성공으로 세계 경제대국의 자리에 우뚝 섰을 뿐 아니라 정치대국의 길을 추구하고 있는 중국 지도부의 ‘시대정신’은 무엇일까? 중국 정부는 이제 국제규범과 인류문명이란 관점에서 한국전쟁을 재평가해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시 부주석 역시 G2시대의 중국을 이끌어나갈 지도자답게 역사적 진실과 보편적 가치를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오늘날 중국 정부와 차기 최고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역사인식과 시대정신의 기초인 것이다.
박병광(국가안보전략硏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