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신학강좌] 영성의 길

입력 2010-11-02 18:34


(17) 그리스도 바라보기

성의 중심은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영적 생활의 초점이다. 죄는 우리 시야를 내면에 고정시키고 믿음은 우리 시야를 그리스도께 고정시킨다. 우리 내면을 계속 응시하면 우리에게 희망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절망이 생긴다. 사람에게는 선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앞에서 보면 실망, 뒤에서 보면 낙망, 옆에서 보면 절망할 수밖에 없다.

설령 내면을 응시하다가 어떤 부족을 발견했다고 해도 우리가 그 부족을 다 채울 수도 없다. 믿음은 안을 보는 것이 아니라 밖을 보는 것이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 구약의 ‘보다’라는 단어는 신약의 ‘믿는다’라는 단어와 내용상 일치한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 예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구리뱀을 바라본 것을 믿음과 동일시했다. 보는 것이 곧 믿음이다. 그리고 믿음은 보는 것이다.

미국 뉴욕경찰서에 가면 이런 표어가 붙어 있다고 한다. “One is for all and all is for one.”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말이다. 이 표어는 우리의 영적생활의 원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곧 그리스도 안에 모든 것이 있고 모든 것을 통해 그리스도를 본다. 아무리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신앙의 연조가 깊어도 한순간 예수님을 시야에서 놓치면 나도 모르게 교회 안의 불신자가 된다.

한때 세상에서 잘 나가던 집사가 있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이 하도 고단하여 어느 날 자기 발로 교회에 들어왔다. 그리고 잃어버린 세월을 보상이라도 할 양으로 목숨 걸고 신앙생활을 했다. 거의 매일 교회에 나왔고 주일이면 거의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가 안 보이기 시작했다. 담임목사가 심방을 가서 대화를 시작했다. 그가 입을 열었다. “목사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한때 잘 나갔습니다. 그러나 만족이 없어서 어느 날 마음먹고 교회에 나갔죠. 그래서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턴가 제 마음에 기쁨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옛날 세상에서 살 때와 마찬가지로 행복하지 않은 거예요. 그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어요. 제 수준이 그것밖에 안 되기 때문이죠?” 그때 목사가 그에게 말했다. “집사님,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세요. 제가 볼 때 집사님은 하나님께 돌아왔지만 삶의 목적이나 방식은 돌아오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때도 집사님은 자기 힘으로 살았고 지금도 자기 힘으로 삽니다. 그때도 자기 행복을 위해 살았고 지금도 자기 행복을 위해 삽니다. 다만 달라진 것은 사는 장소입니다. 그때는 세상에서 살았으나 지금은 교회에서 삽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것은 사는 장소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는 목적과 사는 방식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제라도 집사님은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사는 목적이 되고 예수님이 사는 방식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은 사는 장소를 바꾸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유일한 대상으로 바라보고 예수님을 유일한 삶의 방식으로 모셔야 한다. 내 수준이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 표준이 문제다. 그것이 안 되면 우리는 교회 안의 불신자가 된다.

이윤재 목사<한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