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승만 (3) 고난 통해 남북 화해의 사명 깨달아
입력 2010-11-01 17:30
1950년 12월 3일 어머님과 누이 넷을 남기고 피란을 떠난 후 처음 북한을 방문한 것은 아직 군사독재의 서슬이 퍼렇던 1978년 봄이었다. 그 이후 수십 차례 북한을 방문하고, 또 북한 기독교 대표들을 미국으로 여러 번 초청하는 과정에서 내게는 한동안 ‘친북좌파’라는 딱지가 붙었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나는 공산당 때문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헤어졌고, 그에 대한 원망과 분노로 한 세월을 산 사람이기 때문이다.
북한에 다녀오면 사람들은 내가 그들의 비참한 모습과 식량난에 대해 생생하게 전해 주기를 기대한다. 이 소식을 동력으로 북에 대한 미움과 비판이 계속 재생산되기를 바라는 듯하다.
그러나 나는 언젠가부터 그런 말을 자제하고 있다. 내 사명은 ‘화해자’가 되는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화해하려고 찾아간 사람이, 집에 들어서면서부터 식탁에 먼지가 많다는 둥 그릇에 얼룩이 있다는 둥 흠을 잡아서야 화해를 할 수 없다.
나는 북에 갈 때마다 조금이라도 인간적인 모습, 긍정적인 모습, 좋은 모습을 보려고 노력해 왔다. 지난 16∼23일 방문했을 때도 고아원, 맹아학교, 농아학교, 장애인 훈련시설 등을 둘러보며 어린이와 장애인들이 인간적인 환경 아래 있다는 데 대해 안도감을 느꼈다. 또 현지 사역자들의 헌신적 삶과 우리의 적은 도움에도 크게 감사하는 태도에 감명을 받았다.
특히 황해북도 사리원에 위치한 어린이 시설들을 방문했을 때, 예닐곱 살 어린이들 십수 명이 방문객을 위해 노래를 불러주는데 주책없이 눈물이 핑 돌았다. 아이들은 작긴 했어도 똘똘하고 당차 보였다. 단체 생활을 하며 교육을 받은 때문인 것 같았다.
다만 어떤 눈동자에는 뭔지 모를 결핍이 엿보였다. 부모 슬하에서 자라지 못한 탓인지, 사회 분위기 때문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살고 있는 여든이 다 된 나와, 이곳 사리원에서 살고 있는 예닐곱 살 그들은 결국 같은 땅에서 난 사람들이었다. 나는 거울을 바라보듯이 그 아이들의 눈동자를 오래오래 바라봤다. 나도 그들처럼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를 안고 오랜 세월을 살아 왔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다만 나의 빈 구멍은 이제 채워져 있다. 자유로운 사회에서 살기 때문도, 물질적 풍요 속에 살기 때문도 아니다. 내 삶의 의미를, 사명을 알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기 위한 것일 뿐, 어느 누구의 죄도 아니란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9장에서 제자들이 날 때부터 눈 먼 사람을 가리키며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이렇게 답하셨다. 이 말씀은 내 인생 전체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메시지와도 같다.
내가 늘 품었던, ‘무엇 때문에 고난을 받아야 하나’는 질문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건 인생에 고난이 있는 이유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내 삶에서 나타내고자 하는 뜻이다. 이 깨달음을 통해 나는 화해자의 사명을 받았고 감사하게도 남북 화해, 미국 소수인종 인권 운동, 장로교 연합 등 과정에서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직접 눈 먼 자를 즉시 고쳐주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발라주신 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명하셨다. 눈 먼 사람이 어떻게 실로암까지 갈 수 있었을까? 분명 도움의 손길이 있었을 것이다. 가족이나 지나는 사람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제자들이 나섰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 인생에도 하나님이 보내신 숱한 도움의 손길이 있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깨닫게 하신 것은 나 또한 제자가 되어 도움의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