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홍사종] 고향의 비석공원 이야기

입력 2010-11-01 17:42


“예나 지금이나 서민 희생 딛고 허상의 건조물 쌓기에 골몰하는 위정자들”

얼마 전 경기도 화성시장과 간부공무원들에게 ‘화성시의 정체성’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남양동 비석공원에 얽힌 이야기다. 내가 태어나서 자란 화성시에 가면 오래된 비석들만을 한군데 모아놓은 비석공원을 만날 수 있다. 옛 남양부사(南陽府使)들의 치적과 덕을 기리는 공덕비가 무려 17개나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풍요로운 갯벌과 바다를 끼고 있는 남양 일대는 조선 중기 효종 이전까지 수군(水軍)기지인 영종포영첨사(永宗浦營僉使)가 있었고 삼국시대에는 전략요충지인 당성(唐城)이 있었던 곳이다. 적어도 1300여년 전에는 경주가 서울이었다면, 대당(對唐) 무역항인 당항진(唐項津)을 배후로 낀 남양반도는 지금의 부산에 버금갔던 장소였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하긴 임오군란 직후 청나라의 위안스카이의 군함이 마산포에 정박해서 대원군을 잡아갔고 지금도 시화호로 가로막힌 물길에 전곡 요트항이 마련됐을 정도니 해상으로 번영했던 옛 남양부의 영화를 짐작하게 한다. 그 남양부의 명성을 자랑이라도 하듯 비석공원의 비(碑)들은 화려했던 지방관들의 훌륭한 치적을 기리고 있다.

얼마나 훌륭했으면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 송덕비(頌德碑),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등의 이름으로 기록해서 기억하고자 했겠는가. 실제로 조선시대 지방관의 권력과 위세는 오늘날의 자치단체장을 능가했고 지방관은 백성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선정비나 불망비는 대개 지방관이 임기를 마친 후 선정에 감읍한 고을백성들이 자금을 추렴해서 세운다.

그런데 사실은 정반대인 경우가 더 많다. 남양의 선정비를 거꾸로 읽어보면 아주 재미있는 발견을 할 수 있다. 우선 첫째 선정비의 건립연대가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정(還政) 즉 민란(民亂)의 빌미가 되었던 삼정(三政)이 문란했던 조선 후기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흥미로운 것은 태평성대였다고 알려진 태종과 세종 세조 성종 연간(1392∼1494)과 조선조의 르네상스시대였다고 일컬어지는 영·정조 연간(1724∼1800)에 세워진 선정비는 한 건도 없다는 사실이다. 군왕의 위엄이 서슬 퍼렇던 시절에는 지방관들이 위민의 덕을 베풀지 못했던 것일까. 하지만 답은 금방 나왔다. 선정비가 세워진 인물의 면면을 조선왕조실록 등에서 찾아보다가 놀랄 만한 발견을 했다.

청덕선정비를 세운 조유도(趙有道)라는 인물을 실록은 ‘교만하고 사나울 뿐만 아니라 분수 넘치는 생활을 하는 자’로 평하고 있다. 가는 데마다 선정비를 세웠던 이국헌(李國憲)은 권력의 남용이 아들에까지 이르러 충주의 후임부사에게 곤장을 맞고 아들이 사망할 정도에 이른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압권은 이용태(李容泰)의 영세불망비다. 얼마나 선정을 베풀었으면 백성들이 ‘영원토록 잊지 않겠다’며 불망비까지 세워주었겠는가. 그러나 이용태는 고부민란이 일어나자 안핵사로 파견되어 동학교도들의 재산을 빼앗고 가족까지 잔인하게 살해한 장본인이다. 이로 인해 동학혁명이 거세게 일어났고 이용태는 나중에 일본으로부터 남작 작위까지 받았다.

결국 선정비를 세운 주체가 탐학이 두려운 백성들로 하여금 부임 전에 선정비를 미리 만들어 놓게 한 지방관 본인들이었음을 역사는 쓰고 있다.

엊그제 성남시 전 시장과 그를 둘러싼 세력들의 매관매직 놀음이 크게 신문을 장식했다. 이 부패한 지방자치단체에서는 그것도 모자라 전 시장의 치적을 높이기 위해 아방궁 같은 청사를 건립했다. ‘영원토록 세세토록 잊지 못할’ 불망비를 건립함으로써 자신의 치적을 오래오래 기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재정이 무너지고 빈곤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서민들의 아픔은 아랑곳하지 않고 눈에 잘 보이는 허상의 건조물만 쌓아올리려는 위정자들이 비단 성남시에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남양동의 비석공원은 백성들의 행복보다 눈에 보이는 치적 포장용 비석 건립에만 마음을 쏟는 위정자들에게 주는 교훈을 담고 있다.

홍사종(미래상상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