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태수의 영혼의약국(75)
입력 2010-11-01 11:22
20년 전, 11월
20년 전 일기장을 보다가 문득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흘러가는 것은 흘러가지 않는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 말입니다. 20년 전 11월 오늘은 월요일이었습니다. 이범주 교우네 집을 심방했고, 5공비리특위 장세동 청문회가 있었으며, 이학영 목사네 집에 스피커를 갖다 줬고, 텔레비전을 무지 많이 보았다고 되어 있으며, 박, 김, 오 아무개 목사와 전화 통화를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20년 전 오늘 말입니다.
20년 전 일들은 바람처럼 흘러갔습니다. 흘러간 것 들은 인식(認識)의 세계입니다. 인식의 세계는 흘러갑니다. 그러나 흘러가지 않는 세계가 있습니다. [나]라는 존재의 세계입니다. 20년 전의 나는 지금 여기 그대로 있습니다. 그 [나]가 20년 전의 [나]를 보고 있는 겁니다. 흘러가지 않는 [나]가 흘러간 [나]를 보는 겁니다. 그래서 인식의 세계는 날마다 변화하지만 존재의 세계는 영원불변입니다.
세월이 흘러갑니다. 올해도 참 많이, 그리고 빨리 흘러가버렸습니다. 어느새 11월이니까요. 그러나 세월이 아무리 흘러간다고 해도 시간은 항상 영원 속에 있습니다. 삶이 무상(無常)하다면 그건 인식의 세계에 너무 기울어진 상태로 살기 때문입니다. 늙는 것이 두려운 이유도 그렇습니다. 자못 우리가 존재의 세계, 흘러가지 않는 세계를 알지 못한다면 인생은 참으로 슬퍼집니다. 사는 게 허무해집니다. 시간의 노예, 내일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오늘 속에서 내일 이상의 것을 보아야 하겠지요. 그러면 내일도 주인으로 살게 될 겁니다. 어디서나 주인이 되면 서 있는 자리가 곧 참입니다(隨處爲主立處皆眞).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전 3:14)
<춘천 성암감리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