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형의 ‘문화재 속으로’] (40) 백제의 이자놀이 기록 좌관대식기

입력 2010-10-31 17:32


종이가 없거나 귀하던 고대사회에서는 종이 대신에 어디에다 기록을 남겼을까요. 가장 흔한 것이 나무랍니다. 먹으로 글을 쓴 나무 조각을 목간(木簡)이라고 하고 얇은 대나무에 쓴 것은 죽간(竹簡)이라고 합니다. 죽간은 한반도에서 발견된 사례가 드물지만 목간은 1972년 경주 안압지에서 통일신라시대 실물이 발견된 이후 국내 곳곳의 유적지에서 500여점이 출토됐지요.

경남 함안 성산산성 목간은 물사벌(지금의 경북 상주)의 두지(豆只)라는 사람이 6세기 중반 산성을 축조하는 식량보급품으로 피(볏과의 한해살이풀) 1섬을 제공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고, 경주 월성해자 목간은 한자를 우리말식으로 표현한 이두가 적혀 있으며, 충남 태안 앞바다에서 건져 올린 고려시대 목간에는 선박 적재물품이 기록돼 있어 당시 생활상을 엿보게 합니다.

이 가운데 백제 마지막 수도였던 충남 부여 쌍북리 저습지에서 2008년에 발견된 목간은 7세기 백제 정부가 백성들에게 곡물이나 식량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았다는 사실을 기록한 환곡(還穀) 문서라는 점에서 가치가 높습니다. 이런 공문서로는 국내 가장 오래된 것이거든요. 앞면 61자, 뒷면 58자 등 총 119자가 기록됐으나 아직 판독이 되지 않는 글자가 많은 실정입니다.

길이 81㎝, 너비 2.3㎝, 두께 0.6㎝인 이 목간에는 ‘좌관대식기(佐官貸食記)’라는 제목이 적혀 있답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백제 위덕왕 5년(558)이나 무왕 19년(618) 중 하나일 가능성이 큰 무인년(戊寅年) 6월에 좌관(佐官)이라는 정부 관직에 있는 사람이 누군가에게 각종 곡물(식량)을 대여했다는 겁니다. 이는 조선시대 환곡제도의 원류로 간주할 수 있는 자료랍니다.

일부에서는 이 목간에 기록된 환곡제도가 고구려 고국천왕 16년(194)에 “매년 3월부터 7월까지 관곡(官穀)을 내서 백성의 호구(戶口)에 따라 빌려주되 차등을 매겼다가 10월이 되면 관아에 반납하도록 했다”는 진대법(賑貸法)과 상통한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좌관대식기에 기록된 곡물 대출 시점(6월)이 고구려 진대법 곡물 대출 기간에 포함되는 것도 우연은 아니겠지요.

그렇다면 이자는 없었을까요. 이 목간에는 ‘米三斗’(미삼두·쌀 서말) 등 빌려준 곡물의 단위가 기록되고, 이자를 뜻하는 ‘利’(리)라는 글자가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백제가 춘궁기에 곡물을 꾸어 주면서 그것을 거두어들일 때는 5할 정도의 이자를 쳐서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환곡제도가 그랬던 것처럼 이미 백제시대에 정부가 ‘이자놀이’를 했다는 것이죠.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 재개관 5주년을 기념해 최근 백제실을 새 단장했습니다. 이 전시장에는 2년 간의 보존처리를 거친 좌관대식기가 일반에 처음 선보입니다. 고려 문익점이 들여온 목화보다 800년 앞선 부여 능산리 출토 면직물과 백제금동대향로(국보 287호) 등 유물들도 함께 관람하면서 찬란한 백제문화를 꽃피운 원동력이 꼼꼼한 기록에 있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이광형 문화과학부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