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승만 (2) 축제 분위기 평양 그러나 나는 눈물만…
입력 2010-10-31 19:22
평양은 축제 분위기였다. 그럴 만도 했다. 지난 16일, 내가 도착한 날은 북한이 3대 후계 구도를 세계에 알린 ‘노동당 창건 65주년 기념일’이 1주일도 지나지 않은 때였다.
이번 방문 기간에 만난 사람들은 전에 없이 자신 있고 활기찬 모습이었다. 바깥 세계에서 좋아하건 말건 이들로서는 그동안 불안정했던 후계 구도가 안정된 것에 일단 안심하고, 새로운 도약에 대한 기대를 품는 듯했다.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동안 나는 몇 번이나 눈을 크게 떴다. 여성들의 옷차림이 몰라보게 밝아져 있었다. 키가 커 보인다 했더니 앞쪽에도 굽이 있는 상당히 높은 구두를 신고 있었다. 표정도 발랄했다. 젊은 여성들의 눈매가 반짝반짝해 신기했는데 놀랍게도 쌍꺼풀 수술이 대유행이라고 했다. 해외동포원호위원회 소속 인솔자는 “그 정도는 여기서도 쉽게 할 수 있디요”라고 했다.
함께 간 미국장로교회(PCUSA) 신영순(미국명 Sue Kinsler) 선교사와 함께 1주일간 조선장애인련맹의 안내로 평양과 원산, 사리원의 고아원과 장애인시설 등을 둘러봤다.
매번 북한 방문 때마다 그래왔듯 함흥에 사는 여동생과 친척들을 평양으로 불러 만났다. 이번이 특별했던 것은 인솔자 참관 없이 방 안에서 우리끼리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대동강변 노동신문사 바로 옆에 위치한 ‘해방산려관’에서였다.
네 명의 여동생은 1950년 겨울 내가 집을 떠날 때 14세, 10세, 8세, 그리고 생후 6개월이었다. 그나마 1978년 동생들과 재회해 자주 만나 왔으니 여느 이산가족들에 비하면 엄청난 복을 누린 셈이다. 그래도 마주할 때면 잃어버린 28년의 허전함은 늘 우리 머리 위로 맴돌았다.
나는 피란을 내려간 직후 해병대에 복무하던 시절은 물론이고 미국에 유학 가서도 한동안 북한 정권에 대한 분노와 미움을 품고 있었다. 그들 때문에 아버지를 잃었고, 어머니와 여동생들을 볼 수 없으며, 남동생과 나는 이렇게 힘겹게 살아 왔다고 가슴이 터지도록 원망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대로 살게 하시지 않았다. 그것이 내가 인생에서 받은 가장 큰 축복이다. 흙바닥에서 구르듯이 살아왔다지만 순간순간 뜻하지 않은 도움이 있었고, 귀한 기회들이 다가왔다.
그 모두가 하나님의 가르침이었으나 내가 깨닫지 못하자 어느 날 쇠망치 같은 강한 깨달음을 내리셨다. 넓디넓은 세상에서 미국, 그 중 켄터키에서, 루이빌대학교에서 교목으로 사역했기에 나는 1960년대 흑인 인권운동을 접할 수 있었고 마틴 루터 킹 목사를 만났다.
“우리가 생명을 내 놓고 하고 있는 인권운동은 다만 억압을 당하는 흑인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억압자인 백인들도 함께 해방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킹 목사의 이 연설을 들은 날 그간의 세계관은 깨져 없어졌다. 그리고 다음 말은 내 삶을 바꿨다. “피해자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열쇠를 쥐고 있다”는 말이었다. “피해자에게는 두 가지 선택권이 있습니다. 하나는 똑같이 되갚아 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이전의 낡은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입니다.”
이 때 나는 평생 품어오던, “나는 누구의 죄 때문에 이 고난을 받고 있는가?”라는 질문의 답을 확실히 얻었다. “다만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기 위한 것일 뿐, 어느 누구의 죄도 아니다”(요 9:3)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