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박동수] 종교개혁가 아브라함 카이퍼

입력 2010-10-29 17:28

종교개혁기념일(31일)을 맞아 기독교계에선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의 생애와 신앙을 조명하는 작업이 뜨겁다. 매년 이맘때면 또 한 명의 위대한 종교개혁가를 떠올리게 된다. 네덜란드 총리를 지낸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1837∼1920)다.



카이퍼는 불세출의 칼뱅주의자로 불린다. 교회와 언론, 정치, 교육 등을 넘나들며 칼뱅주의 사회개혁운동의 새 장을 열었기 때문이다. 그의 삶과 신앙은 시대를 초월해 회자되고 있으며, 후대 칼뱅주의자들의 선구가 되었다.

카이퍼가 목회를 시작한 19세기 중반 네덜란드엔 자유주의 신학이 풍미했다. 인간의 이성을 절대시하는 이성중심주의와 세속주의가 합세해 복음주의의 숨통을 조이고 있었다. 카이퍼는 이런 영적 풍토에 깊은 슬픔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오랜 기도 끝에 칼뱅주의에 입각한 교회개혁과 사회개혁운동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복음이 더 이상 세상 한 구석의 종교사상으로만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복음은 ‘땅을 정복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실제적 힘이 돼야 하며, 성경의 규범은 교회를 넘어 현대사회의 난제들에 대한 해결 원리로 적용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신앙 노선을 몸으로 실천했다. 주간지 헤라우트와 기독 일간지 슈탄다트의 편집장을 맡아 칼럼 등을 통해 자유주의 신학을 맹렬히 비판하고 개혁주의 신앙을 옹호했다. 정계에 진출해서는 반(反)혁명당의 지도자가 되었다. 반혁명당은 프랑스 혁명의 무신론적 사고방식에 반대하는 것을 기치로 내건 기독교 정당이었다. 그는 정계에서도 리더십을 인정받아 1901∼1905년 네덜란드 총리로 재임했다. 그는 또 개혁주의운동의 본산인 암스테르담 자유대를 설립하기도 했다.

카이퍼의 신앙노선은 오늘날 한국 교회에도 시사점을 준다. 한국의 교회와 크리스천들은 복음과 사회(국가)의 관계를 설정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신앙으로 사회개혁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혼란을 겪고 있다. 여기에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는 교회뿐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 등 세상 모든 분야에 적용돼야 한다”는 카이퍼의 주장은 포괄적인 답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박동수 선임기자 d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