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체스카 여사의 검소한 삶

입력 2010-10-29 16:20


[미션라이프]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난방은 얼마나 세게 올렸는지, 집에선 반팔 차림도 여간 더운 게 아니다. 밖은 추운데, 잠잘 땐 이불도 덥지 않는다. 지난 여름, 에어컨은 얼마나 세게 틀었는지 실내에서 춥다고 옷을 껴입고, 먹고 살기가 힘들다고 하면서도 음식은 또 얼마나 남겨 버리는지… 과소비의 시대를 살고 있는 부끄러운 현대인들의 일상이다.

만약, 우남 이승만(1875∼1965) 전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 도너 리(한국명 이부란·1900~92) 여사가 이 모습을 보았다면 뭐라 하실까. “하나님이 주신 자원을 낭비하는 것은 죄입니다.”

이 전대통령의 사저인 서울 종로구 이화동 1번지 이화장(梨花莊)을 지키며 검약의 교훈을 가르치는 이인수(79·전 명지대 법정대학장) 박사와 조혜자(68) 권사 부부를 만났다. ‘벽안의 어머니’였지만 누구보다 한국을 사랑한 프란체스카 여사의 일상을 들을 수 있었다.

자손이 없던 이 전대통령 내외는 1961년 이 박사를 양아들로 맞았다. 이 전대통령과 사별하고 프란체스카 여사는 고향인 오스트리아 빈에서 지내다 70년 영구 귀국해 이화장에서 여생을 보냈다. 68년 이 박사와 결혼한 조 권사는 22년간 시어머니를 최측근에서 모셨다.

“요즘 같으면 우리 어머니 ‘72도 작전’을 펼치자고 하셨을 거예요(웃음).”

사람의 체온이 섭씨 36도인데, 두 사람이 합하면 섭씨 72도가 된다는 것이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날씨가 쌀쌀해지면 “기름도 안나는데, 아껴야지”라며 조 권사를 껴안고 이런 ‘작전’을 펴 추위를 이겨냈다는 것이다. 조 권사는 “어머니는 늘 ‘조금 조금’을 외치셨다”며 “기름, 물, 전기를 아끼시느라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낸 적이 없다”고 시어머니를 추억했다.

어디 이뿐인가. 프란체스카 여사는 북한 동포들이 굶주리는 데 두부 한 조각, 밥알 한 알, 콩나물 한 가닥도 못 버리게 했다. 이화장 위쪽에 사는 아파트 주민들이 지대가 높아 물이 안나올 수 있다며 여름이나 가뭄 때는 아예 씻지도 못하게 했다. 손 빨래한 뒤 물을 모아 걸래를 빨고, 그 물은 나무에 부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자신을 위해 돈을 써본 적이 없다. 계절마다 입을 옷이 한 벌씩 밖에 없어 거의 매일 같은 옷을 입었다. 자신의 속옷은 물론, 손주들의 양말이며 속옷까지도 기워 입혔다. 처음으로 남편에게 검정 예복을 선물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프란체스카 여사는 그 옷을 40년간 아껴 입고, 며느리에게 물려줬다. 조 권사도 12년간 검정 예복을 입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조 권사와 함께 사는 20여년 동안 미용실을 가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쪽진 머리를 하고 한국 할머니처럼 산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조 권사의 안내를 받아 프란체스카 여사가 살던 안채로 들어가보았다. 아끼고 또 아끼며 살던 그 옛날 어머니들의 검소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40년을 입었다는 검정 예복뿐 아니라 아들 이 박사에게 선물받아 30년간 사용한 양산, 낡은 핸드백과 구두, 며느리와 함께 쓴 가계부, 손자들에게 깎아준 몽당연필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속옷은 여기저기 기워져 있었고, 이 전대통령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덮었던 담요도 천을 덧대 꿰맨 흔적이 있었다.

그래도 한 나라를 책임지는 대통령의 부인인데….

이 박사는 “어머니의 검소한 삶은 애국애족하는 마음과 독실한 신앙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가난한 독립운동가에게 시집온 것을 늘 자랑으로 여긴 어머니는 통일이 될 때까지는 내핍생활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고 말했다.

92세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프란체스카 여사는 가족과 함께 서울 정동교회에 출석했다. 365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극동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찬송가를 부르며 하루를 시작했고, 며느리와 함께 새벽기도를 드렸다. “어머니는 크리스천이기에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두끼, 세끼를 바라지 않고 언제나 한끼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남북통일을 위해, 우리나라 국민이 모두 집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제 어머니의 그 간절함을 이 박사와 조 권사가 이어가고 있다.

이 박사 부부는 전화 예약(02-762-3171)을 받아 이화장을 개방하고, 안내를 맡고 있다. 원래 대문을 활짝 열고 365일 개방했는데, 숭례문이 불탄 이후 안전상의 이유로 문을 잠그게 됐다. 사실 이화장도 몇 번 불이 난 적이 있는데, 가족들이 소방차가 오기 전에 불을 끄곤 했다.

이 박사는 “아버님은 병환 중에도 우리 민족을 위해 하나님께 축복기도를 드렸고, 어머니도 다함께 잘사는 대한민국이 되게 해달라고 끝까지 기도하셨다”며 “이제 그분들의 신앙과 나라를 사랑한 마음을 올바로 인식하고 우리 민족의 앞날을 위해 고통을 함께 나누자”고 바랐다.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노희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