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우리가 슬픔을 돌볼 시간”… 공선옥 신작 장편 ‘영란’

입력 2010-10-29 17:37


공선옥 신작 장편 ‘영란’/문학에디션 뿔

요즘도 이렇게 소설을 쓰는 사람이 있구나, 싶게 단어와 문장에 고답적인 미덕이 배어있다. 설거지 하고 난 말끔한 개수대를 보듯 작가 공선옥(47)의 살림살이가 아무 보탬도 모자람도 없이 있는 그대로 걸려 있는 게 그의 신작 장편 ‘영란’(문학에디션 뿔)이다. 주인공 영란은 영락없이 공선옥 자신을 닮아 있다. 민첩과 기능주의로 덧칠된 난바다의 세상에 어수룩하면서도 촌스러운 문장의 힘을 보여주는 공선옥. 그가 이번엔 남도의 항구 도시 목포에서 소설의 주인공을 찾아냈다.

“‘이름이 뭐여?’ 나는 이름을 말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왠지 모르게 쑥스러웠다. 내가 머뭇거리자, 할머니가 말했다. ‘누가 물으면 인자부터 영란이라고 해불제 뭘.’”(61쪽)

목포 선창가의 허름한 영란여관. 여관과 식당을 겸하고 있는 할머니가 무심코 붙여준 이름 ‘영란’으로 불리는 ‘나’에게 사연이 없을 리 없다. 열 살 때 장미넝쿨 우거진 의붓아버지의 집으로 들어와 살기 시작한 ‘나’는 간호조무사 일을 하던 중 남편 한상준을 만나 살림을 차린다. 세상 사람들은 ‘나’의 아들을 자폐아라고 부르지만 더 없이 순수하고 맑은 영혼을 지닌 아이가 ‘나’는 사랑스럽기만 하다. 하지만 아들은 물놀이 익사 사고로, 남편은 차량 전복사고로 ‘나’의 곁을 떠난다. 어느 날, ‘나는 남편 선배의 친구이자 작가인 이정섭의 손에 이끌려 목포의 낯선 상가집에 갔다가 무작정 주저앉고 만다.

“가수는 노래 하나로 세상을 보듬어 분단다. 존 것만 취허지 말고 아픈 것도 다아 니 품 안으로 모듬어 부러라, 세상 일이 다 그렇지마는 노래도 목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부르는 것잉게.”(88쪽)

식당일을 도우며 새 보금자리를 만들어가는 영란은 주변 사람들이 한결같이 상처받은 가슴을 다독이며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임자도 간첩단 사건에 연루된 친구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을 짊어지고 평생을 살아온 정영술 선생, 청각 장애인인 모란, 딸을 묵묵히 돌보는 모란의 아버지 황진생, 진짜 남도 사나이 완규….

가족이 남기고 간 빈 자리를 사람 냄새나는 목포에서 치유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 이야기는 슬픔 때문에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영란이 점차 말의 자연스러운 발화를 회복하는 또 다른 과정을 보여준다. “그처럼 일목요연한 말들을 발화하는 걸 내 목구멍에 걸려 있는 체기가 허락하지 않았다”(10쪽)가 “여자는 말 그대로, 상황에 맞는, 그럴법한, 맥락이 분명한 말을 부드럽게 발화하고 있었다”(43쪽)를 거쳐 “의도하지 않은 말들이 툭 튀어나와서 제 멋대로 가지를 뻗었다”(63쪽)에 이른 다음 “그러고 나서 말을 하면, 말은 이제 더 이상 힘들이지 않고도 정확하게 내 의사대로 나와 주었다”(82쪽)로 안착된다.

슬픔의 응어리가 막고 있던 주눅 든 언어에서 벗어나 영란에게 자연스러운 발화의 순간들을 돌려주고 있는 이 점층법이야말로 공선옥표 소설의 핵이다.

“그리고 이제 처음으로, 아이도 아니고 남편도 아닌 누군가가 보고 싶어진 것에 놀랐다. 그는 누구일까. 그 사람이 완규인 것 같기도 했다. 아니면 수옥이일 수도 있었다. 수한이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영란여관 할머니, 혹은 비금이댁인지도.”(203쪽)

슬픔이 지나간 자리마다 꽃은 핀다.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피 한방울 나누지 않았지만 ‘슬픔의 가족’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니 한 시인의 말처럼 ‘슬픔만한 거름이 또 어디 있을까’. 공선옥은 “지금 슬픈 사람들이 자신의 슬픔을 내치지 않기를 바란다”며 “이제는 슬픔을 돌볼 시간”이라고 말했다.

책장을 덮고 나면 우리가 얼마나 사랑하는 사람을 잊고 살아왔는지, 목포항의 불빛이 왜 애처롭게 깜박이는지, 무엇보다 공선옥이 왜 이런 소설을 썼는지 불현듯 알게 된다. 지나간 사랑의 행주를 빨면서 다시 찾아올 사랑을 예감하는 영란은 저마다 상처 받은 가슴을 감추고 사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다. 문득 목포에 가보고 싶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