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드라마 ‘대물’, 여성 정치인에게 물었다… 여자 대통령, 될까?
입력 2010-10-28 19:19
의원님은 반짝거린다. 포마드 바른 머리에 기름진 얼굴을 하고서 광택 나는 자신의 구두를 여성의 입술인 양 부비고 핥는 곰탕집 주인을 내려보며, 만족스러우시고도 잔인한 미소를 지으신다. 그제야 화가 풀리셨나, 의원님은 아들을 두들겨 팬 곰탕집 자식을 용서해 주신다. SBS TV 수목드라마 ‘대물’(고현정 권상우 주연)이 묘사하는 정치인이 이렇다는 얘기다.
첫 여성 대통령의 활약을 그린 ‘대물’. 이 드라마에 대한 여성 정치인들의 반응은 여당 야당으로, 여당은 다시 친이(親李) 친박(親朴)계로 갈린다. 대다수 의원들은 ‘대물’에 대해 코멘트하길 꺼렸다. “보지 않아서 할 말이 없다”는 이유였다.
국민 10명 중 약 3명이 시청하고, 드라마 덕분에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의 대권 도전이 한층 수월해지질 거라는 예측이 나오는데도 애써 무관심한 척했다. 최근 제작진이 교체돼 정치권 외압설이 나돈 ‘대물’과 거리두기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친박계를 제외한 대다수 의원들이 ‘고현정=박근혜’ 프레임의 확대 재생산을 막는 것을 정치적 이득으로 판단한 것일까.
관전평 : 민주 vs 친이 vs 친박
영리한 ‘대물’은 현실 정치와의 교차점을 드라마 곳곳에 배치해 논란만큼이나 시청률도 고공 행진 중이다. 지난 21일(6회분)에는 자체 최고 시청률을 경신해 28.3%(AGB닐슨 미디어리서치 기준)를 기록했다.
지난주 방영분에서 국회의원에 도전하는 서혜림(고현정)은 파란색 바탕의 1번 홍보물로 유세하고, 언론에 허위 정보를 퍼뜨려 경쟁 후보를 비방하는 구악 정치인은 초록 점퍼를 입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을 연상케 하는 구도였다.
“‘고현정이 1번에 파란 띠를 둘렀다’며 아는 사람이 저한테 전화를 한 거예요. 보던 프로그램을 돌려서 드라마를 봤더니 상대 후보는 녹색 점퍼를 입었더라고요. 너무 편파적인 거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다 트집 잡을 필요까진 없죠, 드라마니까.”(민주당 김상희 의원)
“고현정을 볼 때 전 오히려 여성 정치인이 아니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연상됐어요. 노 전 대통령의 저항과 투지, 세상에 대한 비판 의식.”(민주당 김진애 의원)
친이계로 분류되는 한나라당 박순자 의원의 관전평은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는 거다. “서혜림과 살아온 인생이나 경력이 같은 의원은 없어요. 소재라든가 뭐 실현 불가능한 것이 많기 때문에 진지하게 보지는 않고요.”
친박계는 기대 반, 걱정 반이다. “드라마는 이제껏 익숙하지 않은 여성 대통령을 국민들에게 친숙하게 만들어요. 분명 그런 점도 있지만 향후 드라마 전개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박근혜 전 대표는 도움도, 피해도 입을 수 있는 거죠.” 한나라당 이혜훈 의원의 말이다.
-박근혜 전 대표가 ‘대물’을 시청했나요?
“하하하. 드라마 보셨냐고 물어보면 그냥 웃기만 하시고. 제가 ‘대물’에 대해 인터뷰한 걸 박 전 대표가 보시곤 ‘아유, 이런 말씀하셨네요’ 그렇게만 말했어요. (박 전 대표는) 스타일이 좋다, 나쁘다 이런 이야기는 하지 않아요.”
친박계의 기대와 걱정을 저울에 올려놨을 때 기대치가 갖는 중량이 더 큰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다.
‘대물’ 속 국회, 현실 정치보다 올드 패션
“사람 나고 법 났지 법 나고 사람 났냐… 사람이고 짐승이고 다 죽어나가는 판에 무조건 법을 지키라고? 지키다가 죽으라고? 세상에 그딴 법이 어딨어!”(극 중 서혜림의 대사)
서혜림이 정치, 검찰, 언론에 터뜨리는 분노를 보며 시청자들은 속이 다 시원하다는 반응이다.
여성 정치인들도 이런 ‘대물’의 인기 비결에 다들 공감했다. 민주노동당 곽정숙 의원은 “시청자 대부분이 자신을 약자라고 생각한다. 약자가 강자, 권력층에 저항하고 싶은 것을 드라마가 대신 표현해주니까 박수치는 마음으로 보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드라마가 실제 정치와 달라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의견도 많았다. 최초의 청와대 여성 대변인 출신인 민주당 박선숙 의원은 “드라마가 현실보다 올드패션 같은 면이 있다”고 평가했다. 박 의원에게 물었다.
-서혜림은 지역에 고속철도(KTX)를 정차시켜 달라는 유권자에게 “지역 발전과 국가 이익은 균형을 이뤄야 한다”고 대답합니다. 서혜림식 정치가 현실에서도 먹힐까요?
“뉴페이스가 경쟁하는 방법은 기성 정치인과는 달라야 해요. 그런 면에서 드라마 속 전략은 그렇게 새롭지는 않아요. 돈 선거, 네거티브 선거, 조직 동원 등에서 현실성이 없는 부분도 있어요. 반면 미국 드라마 ‘웨스트 윙’은 백악관 직원의 컨설팅을 받아 더 사실적이죠.”
-그래도 시청자가 열광하고 있는데 아직도 정치인을 낡은 시선으로 본다는 뜻이기도 하겠지요.
“정치인들의 변화를 유권자가 체감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려요. 국민들이 그렇게 본다고 해서 분개할 필요도 없는 거고요.”
-박근혜 전 대표에게 유리하게 작용할까요?
“시청자가 박근혜 전 대표와 서혜림을 동일시하느냐, 아니냐, 판단은 시청자의 몫이죠. 오히려 전 이렇게 봐요. 아줌마 코드가 시대의 대세듯 남성 중심적인 구도가 이젠 재미없는 거죠. 만약 남성 신인 정치인이 주연이었다면 파워게임의 성격이 강하고 영웅적으로 그려졌겠죠. 참신성이 부족했을 거예요. 하지만 여성이 주인공이 되면서 좀 더 도덕적이고 생활밀착형 캐릭터가 등장하고, 기존 질서를 대체할 수 있는 스토리가 그려졌다고 봐요.”
여성 의원 44명, 아직 비주류?
여성 권력에 관한 한, 드라마는 현실보다 한 박자 빠르다. ‘대물’에선 여성이 대권을 잡지만 현실 속 여성 정치인들은 아직 국회가 남성 중심적인 공간이라 말한다. 여성 의원은 44명이지만 이 중 70.5%인 31명은 초선 의원이다.
박선숙 의원은 “남성 중심의 기존 질서가 굳건한 상황에서 여성 의원은 남성 의원보다 3배쯤 더 일해야 한다”고 말했다. 취업경쟁에서 동등한 대우를 받으려면 남성보다 학점이 더 높아야 하는 여대생의 처지가 여성 의원과 같다는 얘기다.
“남성 의원들은 대신 다른 데 시간을 많이 써요. 인간관계 같은. 불려 다니는 데가 많고. 여성 의원들도 그런 데 시간을 쓸 수 있겠지만 좀 더 효율적으로 쓰는 게 낫지 않나 싶어요.”(박 의원)
“영남 출신에 보수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사고를 가진 분들이 한나라당에 많이 있어요. 얼마 전까지 최고위원을 지낸 분이 제가 법안 발의를 하는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그러시더라고요. ‘이혜훈, 고분고분하게 말 좀 들어라’고. 특정 여성 정치인 이름 거론 하면서 ‘그 의원은 얼굴만 예쁜 게 아니라 행동도 얼마냐 예쁘냐. 하고 싶은 이야기 다 하지 마라’고. 기가 막히지만 그분이 60세가 다 됐는데 제가 교육할 수도 없고.”
한나라당 이혜훈 의원의 열변이다. KBS ‘개그 콘서트’의 한 코너인 ‘두 분 토론’에서도 여성 의원이 남성 의원에게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고 말하면 관중의 웃음이 터진다. 뭐, 실제 국회라고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여성 의원들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의원님의 야망의 크기는 어디까지입니까? “뭐가 되겠다는 걸 정하진 않고 다만 내용적으로 인정받는 의원이 되고 싶어요.” “현 단계에 충실한 게 중요하죠.” “당 대표요. 아, 재밌으라고 하는 소립니다.” 대다수 의원에게 모범 답변이 돌아왔다.
자리 욕심 없는 정치인이 국회에 그리 많은지 처음 알았다. 한계선을 알아버린, 너무 철든 의원보단 서혜림처럼 철없는 여성 정치인이 더 매력적이겠다. 대통령, 도지사, 장관, 당 대표, 까짓 좀 빵빵 말하면 안 되는 건가.
박유리 기자 nopim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