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富가 아래로 흘러 내리려면 복지라는 펌프가 필요하다”
입력 2010-10-28 18:07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펴낸 장하준 교수, 한국 경제를 말하다
-앨런 그린스펀(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전 의장)과의 토론은 어땠습니까?
장하준(47·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경제학과) 교수에게 물었다. 27일 서울 쉐라톤 워커힐 호텔에서 ‘글로벌 인재포럼 2010’ 첫 순서로 미국에 있는 그린스펀과 1대 1 화상 토론을 벌인 뒤였다. 토론 주제는 ‘위기 이후 세계 경제의 과제’.
“2008년 금융위기를 촉발한 파생금융상품을 어떻게 할 거냐 하는 대목에서 의견이 달랐어요. 그분은 은행 자기자본비율(BIS)을 확 높여서 시장이 알아서 해결하게 하자는 거고, 저는 파생상품이 너무 복잡하고 사기에 가까운 것도 많으니까 규제를 강화해서 단순화시켜야 한다고 했죠. 약품이나 음식은 안전한 것만 팔도록 승인제도를 두잖아요? 금융상품도 그렇게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에드 밀리밴드(영국 노동당 신임 당수)가 점심을 사던가요?
장 교수의 신간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23 things they don’t tell you about Capitalism)’가 지난달 영국 호주 등 영어권 국가에서 출판(미국은 내년 1월 예정)됐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사설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필요한 정치인이 읽어야 할 책”이라며 “에드 밀리밴드, 장 교수에게 점심 한번 사시오”라고 조언했다.
“점심 아직 못 얻어먹었어요(웃음). 노동당보다 영국 정부(보수당과 자유민주당 연립정부)에서 찾던데요. 내각 싱크탱크 역할을 하는 캐비닛 오피스에서 강연했고, 우리나라 옛 상공부에 해당하는 기구에서 기업제도 개편에 관한 자문을 요청하더군요.”
이 책에는 장하준 특유의 화법이 있다. 무척 직설적이고 유머러스하다. ‘지난 30년간 경제학(자유시장 경제학)이 한 짓은 실제로 사람들에게 해를 끼쳤다’거나, ‘(시장에 개입할) 더 크고 더 적극적인 정부가 필요하다’거나, ‘(제조업 시대가 저물었다지만) 따져보면 인터넷보다 세탁기가 더 많이 세상을 바꿨다’거나.
이런 주장을 한다. 1980년대부터 세계 경제를 지배한 건 자유시장 이데올로기다. 시장은 내버려두면 가장 효율적인 결과를 낸다기에 30년간 많은 나라가 민영화와 규제 철폐와 복지 삭감을 했다. 결과는 빈번해진 금융위기와 저성장이다. 2008년 금융위기를 이 정도라도 벗어난 건 각국 정부가 자유시장 경제학이 하지 말라던 정책들을 편 덕이다. 이제 새로운 경제학이 필요하다.
스물세 장(章)으로 구성된 이 책을 읽는 ‘7가지 방법’이 맨 앞에 소개돼 있다. 국민소득은 오르고 기술은 발전한다는데 내가 사는 건 왜 그대로일까 궁금하다면 2, 4, 6…18, 22장을, 세상은 불공평하지만 별 도리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1, 2…15, 20, 21장을 읽어보라는 식이다.
균등한 기회론 충분히 공정하지 않다
-요즘 ‘공정한 사회’ 얘기가 많아서 7가지 방법 중 ‘세상은 불공평하지만…’을 따라가 보니 20장이 눈에 띄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누구에게든 균등한 기회가 주어지는 게 공정한 사회의 기본 바탕”이라고 했는데, 20장 제목이 ‘균등한 기회만으론 충분히 공정하지 않다(Equality of opportunity may not be fair)’더군요.
“기회 균등만 보장되면 그 다음엔 경쟁에 승복해야 한다는 게 자유시장주의의 기본 논리죠. 아주 작게 보면 맞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100m 달리기를 하면서 다리에 모래주머니 달고 뛰어야 하는 선수가 있다면, 호각 소리에 맞춰 동시에 출발한다고 공정한 경주가 될까요? 가난한 아이들을 무료로 학교에 보내주고, 무료 급식 준다고 기회 균등이 다 되는 게 아닙니다. 아이들이 제대로 공부하려면 가정에서도 보살핌을 받아야 해요. 그러려면 가난한 부모에게 아이들을 보살필 최소한의 수입이 보장돼야, 즉 ‘기회’뿐 아니라 ‘결과(부모의 소득)’도 어느 정도는 균등해야 진정 균등한 기회가 된다는 거죠. 그렇다고 공산주의처럼 다 똑같게 하자는 건 말이 안 되고요. 그러면 가난해도 열심히 보살피는 부모들에게 불공정해지니까.”
-그렇게 균등한 기회가 한국에선 얼마나 보장되고 있을까요?
“어떤 부모 만나느냐에 따라 굉장히 차이가 많이 나는 사회가 됐어요. 지금 기성세대는 전쟁으로 다 같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비교적 공정한 경쟁을 했지만, 그 자식세대는 부모에 따라 인생이 결정되는 상황까지 왔잖아요. 복지 시스템이 워낙 약한 데다 사교육이 너무 중요해져서. 한국의 복지 지출 비중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멕시코 다음으로 꼴찌에서 두 번째예요.”
-‘부모 변수’가 커진 게 복지 때문인가요?
“예전엔 미국이 아메리칸 드림이란 말처럼 하류층에서 중·상류층 되기가 쉬웠고, 유럽은 신분제 전통이 남아서 계층 이동성이 훨씬 낮았습니다. 지금 아메리칸 드림을 말하면 거짓말이죠. 계층 이동성을 조사해 보면 북유럽 국가들이 영국보다 높고, 영국이 미국보다 높아요. 복지가 잘된 나라일수록 부모 변수가 줄어드는 거죠. 그런데 자유시장주의자들은 늘 작은 정부를 외쳐 왔어요.”
복지국가 노동자는 모험심이 많다
장 교수는 한국 이공계 학생들의 의대 선호 현상도 복지와 관련돼 있다고 설명했다. 상위 2%에 든 이공계 입시생 5명 중 4명이 의대를 희망했다는 2003년 조사 결과를 예로 든다.
“의사는 원래 인기 직종이지만 이건 한 차원 높아진 인기예요. 더구나 의사 수가 늘어서 수입은 예전보다 줄어든 상황이니까. 원인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평생고용이 사라지고, 실직한다는 게 예전보다 훨씬 끔찍해졌기 때문이에요. 한국은 IMF(국제통화기금) 돈을 빌리면서 철저한 자유시장주의를 채택해야 했습니다. 노동시장 유연성을 높이느라 비정규직이 늘고, 퇴직 연령이 급격히 낮아지고, 재취업은 어려워졌는데 복지 제도마저 취약하니까 실직 생활이 비참한 거예요. 학생들이 이런 상황을 고려해서 보수적인 선택을 하게 된 거죠. 의사는 다른 직종보다 실직할 염려가 적잖아요.”
그는 미국 노동자보다 유럽 노동자가 훨씬 모험적이라는 분석을 덧붙였다.
“자동차노조 등 미국 거대 노조들이 하는 게 뭡니까? 정부에 압력을 넣어서 자기 산업, 현재 일자리를 보호하는 겁니다. 복지가 취약해서 그 일자리 잃으면 의료보험마저 잃게 되기 때문이죠. 반면에 유럽 노동자들에겐 실직이 세상 끝나는 문제가 아니에요. 실직 전 월급의 80%까지 실업수당을 타면서 재취업 교육을 받으면 됩니다. 그래서 산업 구조조정이 필요할 때 변화를 수용하는 정도가 미국보다 훨씬 능동적이에요. 이건 경제에 활력을 주는 큰 요소고, 경제성장률에도 반영됩니다.”
장 교수는 1950∼87년 미국이 유럽 어느 나라보다도 성장 속도가 더뎠으며, 90년 이후 OECD 핵심 국가 중 가장 빠르게 성장한 두 나라가 핀란드와 노르웨이였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했다. 자유시장 경제학에선 실업수당, 의료혜택, 무상교육 같은 복지제도가 노동자의 일할 의욕을 떨어뜨려 경제가 활력을 잃는다고 주장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부자 감세’… ‘복지 펌프’
장 교수를 인터뷰하던 날 한나라당에선 소득세·법인세 최고세율 인하안을 철회하느냐, 마느냐 소동이 있었다. 고소득자와 기업의 세금을 줄여주는 것이어서 ‘부자 감세’ 논란을 일으킨 법안이다.
감세 정책을 찬성하는 쪽은 ‘트리클 다운 효과(trickle down effect)’를 주장한다. 위에서 흘러넘친 물이 아래로 똑똑 떨어지듯, 상류층의 부(富)가 커지면 하위 계층으로 옮겨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장 교수 책의 13장 제목은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든다고 우리 모두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였다.
-부(富)는 물처럼 흘러내리지 않는다는 말인가요?
“그 논리는 투자자에게 소득을 몰아줘야 경제가 성장하고, 전체 파이가 커져서 가난한 사람 몫도 늘어난다는 겁니다. 투자자란 결국 부자들이죠. 그런데 최고 성장률을 기록해 자본주의의 황금기라는 1950∼73년은 주요 자본주의 국가에 누진세제가 도입돼서 부자들에게 중과세하던 시기예요. 그러다 70년대 중반 이후 성장률이 떨어지자 자유시장주의자들이 부자 감세를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부자들에게 유리한 정책이 본격화된 80년대 이후 성장률은 전보다 더 떨어졌어요. 파이가 커지지 않은 겁니다.”
-흘러내릴 부가 생기지 않은 거군요.
“설령 파이가 커진다 해도 그냥 놔둬선 흘러내린다는 보장이 없어요. 1989∼2006년 미국 총소득 증가분의 91%가 상위 10% 계층에 돌아갔어요. 상·하위 계층의 소득 불평등이 심화된 거죠. 흘러내리게 하려면 펌프가 필요합니다. 벨기에나 독일은 세금 징수 이전 소득으로 보면 상·하위 격차가 미국보다 더 커요. 미국보다 더 심하게 상층부에 몰려 있는 부를 강력한 복지 시스템이란 펌프로 흘러내리게 만든 겁니다.”
-한국의 부자 감세 논란은 어떻게 보십니까?
“요즘 같은 불황기에는 저소득층을 위한 복지 지출이 같은 액수의 부자 감세보다 경기활성화 효과가 더 큽니다. 가난할수록 들어온 돈을 대부분 쓰게 되니까요. 또 스웨덴과 일본의 소득 재분배 방식이 다른데, 스웨덴은 마음대로 벌게 한 뒤 왕창 세금 걷어서 분배하고, 일본은 각종 규제로 돈 벌 기회를 고르게 주는 식입니다. 대점포법이 대표적 예죠. 대형마트가 들어설 때 주변 소상인들에게 동의를 얻게 하는. 우리도 일본식이었는데 시장 자유화하면서 그런 규제가 많이 사라졌어요. 그럼 스웨덴처럼 세금을 이용한 복지정책을 제대로 해야죠.”
그럼, 한국 경제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한국이 가장 빠른 경제 회복을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은 금융위기가 터졌을 때 제일 빨리 추락했던 나라 중 하나예요. 경제의 대외 의존도가 높아서 그렇죠. 그러다 외부 상황이 개선되니까 빨리 올라가는 겁니다. 좋아할 일도, 슬퍼할 일도 아니고, 그럴 수밖에 없는 구조인 거죠.”
-한국의 의존도가 높아진 중국 경제에도 관심이 높습니다.
“엄청나게 성장했지만 아직 1인당 국민소득이 미국의 10분의 1도 안됩니다. 그런데 불평등은 굉장히 커졌어요. 지금은 워낙 고성장세여서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있는데 성장이 꺾인다거나, 갑자기 실업자가 늘어난다거나, 정치적 변화가 생긴다거나 하면 크게 폭발할 수 있습니다.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5년 전부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얘기도 들리고요.”
-한국인들이 자본주의에 대해 갖고 있는 가장 큰 착각이 뭘까요?
“미국 자본주의가 표준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스웨덴 얘기를 하면 인구가 우리나라 5분의 1밖에 안되는데 뭘 배우겠냐는 분들이 있어요. 그러면 미국은 인구가 우리의 5배가 넘고 엄청난 자원이 있는데 그걸 어떻게 따라합니까? 남미에 ‘교황보다 더 독실한 가톨릭 신자(more Catholic than Pope)’란 말이 있는데, 한국에도 들어맞는 말이에요. 조선은 중국보다 더 유교적이었고, 북한은 러시아보다 더 철저한 공산주의를 했고, 한국은 미국 자본주의를 더 철저히 따라하려는 경향이 있죠.”
-요즘 한국 정치권은 모두 서민을 얘기하고, 다음 대통령 선거의 최대 이슈가 복지라는 전망도 있습니다. ‘복지 대통령’을 꿈꾸는 사람이 있다면 가장 염두에 둬야 할 게 뭘까요?
“전에는 돈 없어서 복지 못한다고 했지만 이젠 그런 핑계도 없죠. 복지국가로 가려 할 때 두 가지는 꼭 해야 합니다. 하나는 가난한 사람 골라서 도와주는 미국식 선별적 복지가 아니라 유럽식 보편적 복지를 하는 겁니다. 선별적 복지는 돈 많은 사람에게 빼앗아서 없는 사람 나눠주는 것밖에 안돼요. 세금 내고 혜택 못 받으면 불만 생기고, 게으른 사람 먹여 살린다는 오해가 생기고, 복지 수혜자란 낙인이 그 사람에겐 걸림돌이 됩니다. 누구나 다 나이 들고, 누구나 다 아플 수 있고, 누구나 다 다칠 수 있으니까 다같이 돈 내서 보험 든다는 접근법이 보편적 복지예요. 그래야 나중에 와해되지 않습니다. 다른 하나는 사회안전망을 잘 갖춰서 안심하고 시대의 변화, 산업의 변화를 수용하면서 도전하게 만들어주는 생산적 복지를 해야 합니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는 독일 네덜란드 중국 일본 러시아 태국 등지에 번역, 출판될 예정이다. 한글판(사진·출판사 부키)은 오는 1일 서점에 배포된다. 한국에선 어떤 정치인이 그에게 점심을 제안할지 궁금하다.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