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용의 공간 너머] 적과의 동거

입력 2010-10-28 17:56


1945년 광복으로부터 1953년 휴전협정 체결까지 8년간, 한국인들은 극심한 이념 대립으로 정치 사회적 혼란을 겪었다. 특정한 이념으로 무장하고 언제 어느 곳에서나 정체를 선명하게 드러낸 사람들에게야 문제될 것이 없었지만, 평생 이념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온 평범한 사람들은 그때그때 어느 편에 설 것인지를 임기응변으로 판단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순간의 판단에 따라 생사(生死)가 갈리는 일도 흔했다. 낯선 사람은 일단 ‘적(敵)’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고 대해야 했으니, 상황 자체가 인간의 생존에 적대적이었다. 적대적 상황이 장기간 지속되다 보니 사람들의 의식 깊은 곳에 내 편 아닌 사람은 모두가 적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은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적대적 타인뿐 아니라 ‘다른 생명체’들도 사람의 생명을 수시로 위협했다. 광복 직후 200만명 이상의 해외 동포가 귀국했고, 뒤이어 50만명가량의 월남민이 추가됐다. 한국전쟁 중에는 700만명 이상이 피란 경험을 했다. 떠돌아다니는 수많은 사람들, 더구나 제때 씻지도 갈아입지도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온갖 미생물과 벌레들이 활개치고 다녔다. 사회질서 전반이 허물어진데다가 위생지식도 형편없었기에 물이든 채소든 오염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미군이 아무리 DDT를 뿌려대고 곳곳에 검역소를 만들어 행인들에게 예방접종을 해도 미생물과 벌레들을 없애지 못했다.

한국전쟁 발발 직전 정부가 추산한 바에 따르면 38선 이남에만 폐결핵 환자 120만명, 성병 환자 50만명, 나병 환자 5만명, 간디스토마 환자 100만명, 기타 기생충 감염 환자 1000만명 이상이 있었다. 매년 폐결핵으로 사망하는 사람만 5만명 이상이었고, 계절을 바꾸어 가며 공격해 오는 급성 전염병들도 사람 목숨을 우습게 여겼다.

두창, 콜레라, 장티푸스, 발진티푸스, 뇌염, 말라리아, 이질 등으로 매년 적게는 수백명에서 많게는 수천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세상을 떠났다. 생후 1년 이하 영유아 사망률은 무려 40%로 세계 1위였다. 누구나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이런 상태는 한국전쟁 중 더 악화됐다. 미군은 엄청난 양의 DDT를 뿌렸지만, 오히려 벌레들에게 내성만 키워주었다. 전염병은 피란민과 포로, 군인들 사이에서 수시로 기승을 부렸다.

휴전이 됐다고 사태가 극적으로 반전될 이유는 없었다. 1960년대 초반까지 10여년간, 사정은 조금씩 나아졌지만 미생물과 벌레들은 여전히 한국인의 몸 안팎에서 떠나지 않았다. 전 인구의 50% 이상이 뱃속에서 회충, 요충, 십이지장충, 편충, 촌충 등의 기생충을 ‘키우고’ 있었다. 디스토마나 사상충 같은 기생충이 몸 안에 달라붙어 있는 사람도 드물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의 머리카락 속에 이가 득실거렸고 속옷 안에서는 벼룩이 뛰어놀았다.

농촌 가옥이나 도시 판잣집의 방 벽에는 바퀴벌레가 새카맣게 붙어 있는 게 보통이었다. 여름철 낮이면 밥상에 파리가 먼저 앉았고, 어두워지면 모기가 밤새도록 앵앵거렸다. 부엌은 쥐들의 놀이터였고, 개중에 괘씸한 놈들은 천장 위에 살림을 차리기도 했다. 천장에 쥐가 없는 집 서까래 밑에는 종종 뱀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반세기 전, 한국인 몸 안과 밖에는 ‘인간의 생명에 적대적이며 위협적인’ 다른 생명체들이 무수히 살고 있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은 경제뿐 아니라 위생적으로도 엄청난 ‘압축 성장’을 이뤄냈다. 이제 수억 내지 수십억 마리에 달하던 기생충은 거의 멸종 상태가 됐으며, 5000만 인구 중 전염병 사망자는 연간 수십명을 넘지 않는다. 지난 봄 전 국민을 공포에 떨게 했던 신종 플루 사망자도 50명 미만이었다. 도시의 고층 아파트에서는 파리나 모기를 보는 일조차 흔치 않다. 요즘 사람들에게 집 안에서 쥐나 뱀과 함께 사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인들은 인간에 적대적인 ‘다른 생명체’들을 자기 몸 주변에서 아주 성공적으로 몰아냈다. 그 과정에서 세상의 모든 적대적인 것들을 박멸할 수 있다는 생각, 온 세상을 내 편으로만 채울 수 있다는 믿음, 나에게 해로운 것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 태도도 보편화했다. 그러나 바퀴벌레, 파리, 모기, 쥐, 뱀 따위가 멸종된다고 해서 사람들이 지금보다 더 행복해질지는 모를 일이다. 어쩌면 적대적인 것들과 함께 살면서 견뎌내는 법에 대해서는 옛 사람들에게서 배울 점이 남아 있을 것이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