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영암F1을 아느냐… ‘2010 포뮬러원 코리아 그랑프리’ 뒷얘기
입력 2010-10-28 17:57
누구는 초등학생을 상대로 한 박사급 세미나에, 어떤 이는 프로 축구팀 없는 나라가 유치한 월드컵에 비유했다. 지난 주말 전남 영암에서 열린 국제자동차경주대회 ‘2010 포뮬러원(F1) 코리아 그랑프리’는 그만큼 느닷없는 사건이었다. 프로 카레이서 50명밖에 없는 모터스포츠 불모지. 그곳에 세계 3대 스포츠 이벤트를 유치했는데 중앙정부는 무심했고 기업은 냉담했다. 무엇보다 원래 팬이 없었다.
대회가 끝나고 평은 엇갈렸다. 첫 대회치고 잘했다는 격려와 준비가 부족했다는 비판이 같이 나왔다. 인터넷은 외신기자의 러브호텔 인증샷과 마무리가 덜된 시설, 공짜 표 남발 등으로 들끓었다. 하지만 영암이 시작이었음은 분명했다. 17만명이 영암을 찾고, F1이 밥상머리 화젯거리가 된 것만도 성과였다. 영암에서 대회기간 내내 오간 3가지 질문을 중심으로 F1 코리아 그랑프리의 뒷얘기를 정리했다.
① 자동차메이커는 F1 후원을 안 한다?
F1 코리아 그랑프리의 공식 후원사 200여개 중 한국 기업은 한 곳, 그것도 자동차 메이커가 아니라 전자회사였다. LG전자는 F1 전체의 글로벌 후원사이자 ‘레드불레이싱’ 팀의 개별 후원사로 동시에 이름을 올렸다. 홍보 효과는 컸다는 평가다. 한국은 세계 자동차생산 5위국. 내수보다 수출 파이가 크다. F1은 자동차경주대회다. 당연히 자동차 메이커에는 좋은 홍보기회인데 국내 업체는 나선 데가 없다. 왜 우리 자동차회사들은 세계 최대 카레이싱 이벤트라는 ‘차려진 밥상’에 등을 돌렸을까.
한국 자동차 메이커의 수출 타깃은 F1의 주 무대인 유럽시장이 아니다. 유럽 팬을 설득해봐야 당장 판매량 향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레이싱팀 운영은 더욱 부담스럽다. 레이싱팀 한 곳의 운영비는 연간 2억∼3억 달러. 수백억원대 연봉의 스타 드라이버에 30명 안팎의 기술팀, 100억원의 머신까지 제작하려면 천문학적 액수가 든다. 기술력 차이도 난관이다.
이동훈 드라이빙스쿨 대표는 “유럽 메이커와의 기술 차이가 너무 커서 거액을 투자해도 성적이 좋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위험을 감수할 만큼 얻을 게 많지 않다고 판단한 것 같다”고 말했다. 자동차 전문지 오토타임스 권용주 팀장도 “어차피 유럽에서 한국 브랜드가 고급차 이미지로 팔리는 게 아니다. 같은 마케팅 비용을 남미 같은 지역에 투자하면 더 큰 효과를 낼 수 있는데 F1에 투자할 이유가 있겠느냐”고 분석했다.
한편에선 F1이 자동차 메이커의 프리미엄 클럽 진입 기회라는 목소리도 있다. F1 레이싱팀은 고급 브랜드의 신분증과 같다. 페라리, 메르세데스 벤츠, 맥라렌, 르노 등 전통의 유럽 메이커들이 고비용을 감당하며 레이싱팀을 유지하는 이유는 F1이 기술경쟁의 상징적 전장이기 때문이다.
카레이서 출신으로 드라이빙스쿨을 운영하는 윤철수 대표는 “한국과 유럽연합의 자유무역협정이 비준되면 유럽시장에서 브랜드 이미지를 높이는 게 중요해질 것이다. F1은 중저가 한국 메이커가 고급 브랜드로 도약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② F1 선수 한 명 없이 대회 유치?
한국에는 F1 드라이버가 한 명도 없다. F1 개최국에 선수가 없다는 게 이상한 일만은 아니다. F1 드라이버는 전 세계적으로 24명. 그중 아시아권에서는 일본인 선수 2명이 유일하다. 일본 중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 현재 F1을 열고 있는 아시아 4개국 중 F1 드라이버를 배출한 건 일본뿐이다. 따라서 고민은 F1 드라이버가 없다는 현실이 아니라 “지금 시작해도 10년 내 F1 드라이버가 나오긴 어렵다”는 전문가들의 비관적 전망이다. 도대체 F1 드라이버가 뭐기에?
F1 드라이버가 되려면 마이너 대회격인 F3에서 두각을 나타내야 한다. F3는 나라별로 예선을 거친 뒤 각국 우승자들이 1년에 한 번 마카오에 모여 우승자를 가린다. 한국 선수는 일단 마카오 진출이 힘들다. 한국에 F3 예선전이 아예 없기 때문이다. 실은 ‘포뮬러’라고 불리는 자동차경주 자체가 없다.
모터스포츠는 크게 포장(온로드)과 비포장(오프로드)으로 나뉜다. 온로드는 다시 차량을 새로 제작하는 포뮬러와 기존 차량을 개조하는 투어링카 부문으로 나뉜다. 포뮬러는 투어링카보다 급이 높다. 머신 제작에 돈이 많이 들고, 기술력이 뒷받침 돼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포뮬러는 모터스포츠의 꽃이다.
국내 대회는 ‘CJ 티빙닷컴 슈퍼레이스 챔피언’ ‘GT 마스터즈’ 등 4개. 이중 포뮬러는 없다. 유일하게 운영되던 ‘CJ 슈퍼레이스’의 포뮬러는 2008년 시즌부터 폐지됐다. CJ 슈퍼레이스관계자는 “국내 포뮬러 시장이 워낙 작아 머신을 들여오는 것도, 유지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3∼4대만 참가해 대회 유지가 어려웠다”고 말했다.
③ F1이 전남 영암에 ‘왕림’한 이유는?
1950년 시작된 F1은 정통 유럽 스포츠다. 선수 대다수는 유럽계 코카시안. 이 때문에 흑인계 루이스 해밀턴 선수는 ‘F1의 타이거 우즈’라고 불린다. 6억명이라는 F1 시청자도 3분의 2가 유럽과 북미 등 서구권이다. F1 운영사인 포뮬러매니지먼트(FOM)가 팬이 거의 없는 한국, 그것도 허허벌판이던 영암을 낙점한 데는 이유가 있다.
F1 인기는 최근 하향추세다. 시장 자체가 포화인 데다 북미권 시장이 이탈조짐이다. F1의 까다로운 규정 때문이다. F1은 전용서킷에서만 경기를 하지만 미국에서는 길을 막고 도로에서 레이스를 한다. 머신 한 대 개발비도 F1이 100억원이라면, 미국 레이스용은 20억원이면 충분하다. 실용적이고 경제적인 운영 덕에 미국 레이스는 참가자도, 관객도 많아지고 있다. 설상가상, 2008년 국제 금융위기로 F1 후원사는 계속 줄고 있다.
영암 대회는 하락세 유럽시장을 신흥 아시아시장으로 보완하려는 개척의 의미가 있다. 이동훈 대표는 “인기가 예전 같지 않은 F1이 아시아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영암의 경우 1년 개최권료만 340억원을 냈다. FOM은 추가 수익에다, 아시아의 새 팬층까지 확보하게 됐다. 2004년 중국 상하이에서 F1 대회를 연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분석했다.
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