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도가 저 그늘진 땅에 햇볕 한 줌 될 수 있다면… ‘서울 강남의 소외 섬’ 구룡마을을 가다

입력 2010-10-27 18:08


2010 서울 G20 정상회의가 열흘 남짓 앞으로 다가왔다. G20 정상회의 의장국이 됐다는 것은 대한민국이 비로소 국제무대의 중심에 섰다는 것을 말해준다. 다음달 8일과 9일 정상회의가 열릴 서울 삼성동 코엑스는 삼엄한 경비 속에 대회 준비로 분주하다.

코엑스에서 차를 타고 10분. 대모산 밑 한 마을을 만난다. 이 마을 주민들에게 G20 정상회의나 대한민국의 높아진 국제적 위상은 먼 나라, 남의 나라 얘기일 뿐이다. 밤이면 부유함의 상징 타워팰리스의 휘황찬란한 조명을 물끄러미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이곳, 무허가 판자촌 구룡마을. 30년 가까이 개발과 철거 사이에서 신음해온 이 마을 사람들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피폐해 있었다.

을씨년스럽다

지난 25일 오후 472번 시내버스를 탔다. 한남대교를 건넌 버스는 강남의 한복판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버스 창밖으로 많은 사람이 보였다. 압구정동 로데오거리 커피숍에는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꽃을 피웠다. 강남구청사거리를 지날 땐 서류뭉치를 든 회사원들의 잰걸음을 봤다. 진선여고 정류장에서는 막 수업을 마친 여고생들이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며 버스를 기다렸다. 추운 날씨임에도 사람들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버스는 계속 내달렸다. 도곡동 한가운데에 우뚝 솟은 타워팰리스의 크디 큰 유리창은 듬뿍 받은 햇빛을 다시금 내뱉고 있었다. 눈이 부셔 질끈 감았다. 감은 눈을 다시 열었을 무렵 ‘만원’이었던 버스는 어느새 텅 비어 있었다. 버스의 마지막 정류장 개포중학교를 지날 때 버스에 남은 사람은 기자와 50대 남성 단 둘이었다.



버스에서 내리자 시원하게 뻗은 왕복 10차로 양재대로 위 차량들이 시원하게 속도를 내고 있었다. 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분명 강남인데….’ 쓰레기 냄새가 진동했다. 그때 사거리 높은 곳에 걸린 푯말이 눈에 들어왔다. ‘구룡마을 입구.’

올 가을 들어 중부지방이 처음으로 영하의 기온을 보인 이날, 마을은 더욱 을씨년스러웠다. 길 맞은편, 일렬로 정돈된 개포동 아파트 단지를 뒤로한 채 발걸음을 옮겼다. 좌우로 널린 쓰레기와 오물. 마을의 첫 인상이었다. 시큼한 냄새가 코를 점점 강하게 자극했다. 차 한 대가 경적소리를 내며 지나가자 먼지가 피어올랐다. ‘콜록콜록’ 기침이 나왔다.

5분 정도 걷자 집들이 나타났다.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불이라도 나면 마을이 홀랑 없어질지 모르겠다. 문 바로 위에는 거주자의 이름이 적힌 문패가 붙어 있었다. 허리를 바싹 숙여야 집 안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지붕이 낮았다. 한 집 앞에서 할머니 한 분이 폐지를 모아 묶고 있었다. 표정이 밝지 않았다. 연신 기침을 했다. 기침을 할 때마다 얼굴에 파인 주름은 더욱 깊어졌다.

“이거라도 해야지.” 허리를 숙여 종이를 매만지는 사이 윗옷과 바지 사이로 살이 드러났다. 아니 뼈가 드러났다고 해야 맞겠다. “여기 혼자 살면서 잘못 챙겨 먹어. 살이 많이 빠질 수밖에 없지.” 마을 어귀에서 만난 할머니, 이곳의 현실을 보여주는 듯했다.

사람들이 죽어간다

“자꾸 사람들이 죽어나가니 마음이 찢어집니다.”

1987년부터 마을 중심에 은진교회를 세우고 목회를 하고 있는 김문배(63) 목사의 말이다.

얼마 전 일이다. 매주 수요예배에 열심히 참석하던 노인이 예배시간이 지났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김 목사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평소에도 하루 정도 교인이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일은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뭔 일이 있겠지….’

예배를 마친 뒤 김 목사는 머리카락을 잘라주는 봉사를 하는 집사에게 부탁해 자신도 모르게 길어져 버린 머리카락을 다듬었다. 반쯤 잘랐을까. 아내가 교회로 뛰어 들어오며 숨이 넘어갈 듯 소리쳤다. “목사님, 빨리.”

아내의 뒤를 쫓아갔다. 아내가 멈춰선 곳은 수요예배에 참석하지 않은 바로 그 할머니의 집 앞. 문을 열고 들어서자 썩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싸늘한 시신. 주일예배를

드리고 수요일에 발견했으니 그 사이 언젠가 돌아간 것이겠다. 집안을 아무리 뒤져도 보호자의 이름이나 전화번호는 나오지 않았다. 노인은 그렇게 쓸쓸이 세상을 등졌다.

은진교회는 이가 없어 음식을 씹지 못하는 노인들을 위해 매주 토요일 죽(粥)을 돌린다. 지난 토요일에도 어김없이 호박죽, 팥죽, 야채죽을 정성껏 만들어 노인들에게 전달하고 있었다. 유독 야채죽을 좋아하던 노인의 집 앞에 도착했다. 항상 죽을 받으면서 고맙다는 의미로 물 한 잔을 꼭 내오던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였다. 그런데 이날따라 할아버지가 문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무리 목청 높여 외쳐도 감감무소식이었다. 김 목사가 손가락으로 창문 틈을 어렵게 벌렸다. 그러자 좁은 방안에 힘없이 옆으로 쓰러져 있는 몸이 눈에 들어왔다. ‘또 가셨구나….’ 이제 놀랄 일도 아니다. 이런 일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기에….

불안하다. 희망을 찾을 순 없을까

“이 마을 사람들은 아무래도 거칠고 정서적으로 불안정할 수밖에 없죠.”

한 달에도 수차례 위의 두 노인과 같이 소리 소문 없이 사람이 죽어나가는 곳. 개발과 철거 사이 줄다리기를 30년 동안 하고 있는 곳. 개발만 되면 가치가 천정부지로 솟는 곳. 2000세대가 거주한다고 하나 실제 600여 세대로 ‘허수’의 비밀을 안고 있는 곳. 마을 자치회장이 누구냐에 따라 온갖 회유와 협박에 시달려야 하는 곳. 정작 사는 사람은 땅주인보다 독거노인과 같은 가난한 이들이 많은 곳. 그러니 이곳 사람들의 마음 상태가 안정적일 리 만무했다.

마을을 몇 바퀴 돌며 사람들을 만났다. 얼굴에서 웃음을 찾기 어려웠다. 외부인과 얘기를 나누기조차 꺼렸다. 부자(父子)로 보이는 남성 두 명이 지붕 위에 올라가 있었다. 뭐하고 있냐고 물었지만 답이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도 별다른 대화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좀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사람이 “그쪽을 좀 잡아당겨봐”라고 말한 게 대화의 전부였다. 그들은 묵묵히 손에 쥐고 있던 긴 비닐을 지붕에 덧댔다. 바람을 막기 위해 지붕에 비닐을 대고 있다는 걸 유추할 수 있을 뿐이었다.

김 목사는 처음부터 이렇지는 않았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교회를 세울 당시부터 쭉 주일 오전 9시와 11시, 수요예배와 금요기도회가 시작되기 직전 교회 종탑에서 종을 쳤다. 교회 스피커로 찬송가를 틀기도 했다. “교회 종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많은 사람이 회개를 했고 예배에 참석하겠다는 다짐도 했죠.”

하지만 8년 전부터 김 목사는 교회 종을 치지 않는다. 그곳의 삶에 닳고 닳은, 지친 주민들이 “교회 종소리 듣기 싫다”며 항의했기 때문이다. “교회 종소리가 멎은 뒤 이곳이 더욱 강퍅해진 것 같아요.”

김 목사는 “개발 때문에 이곳의 신앙인들이 넘어지고 있는 게 가장 속상합니다”라고 했다. 눈앞의 이권 때문에 신앙마저 내팽개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몇 년간 교회를 떠나간 사람이 셀 수 없을 정도다. 80년대 말 15개에 달했던 교회는 지금 8개에 불과하다. 그마저도 대부분 10명 안팎의 교인만 예배에 참석할 뿐이다. 150명까지 교인 수가 늘었던 은진교회 역시 40명 선으로 교인이 줄었다. “‘아파트를 주겠다’는 사람의 말에 현혹돼 그를 구세주로 여기는 마을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 일을 겪다 보니 참 힘이 드네요.”

그래도 김 목사는 마지막 희망의 끈마저 놓지는 않고 있다. 뜻 있는 외부인들과 함께 구룡마을을 위해 기도하며 봉사활동을 계속 해 나간다. 몇 해 전 찾아온 파킨슨씨병으로 발음이 명확하지 않은 김 목사가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우리 마을 사람들, 오죽하면 그럴까. 이해는 해요. 하지만 돈만을 쫓아가면 망할 수밖에 없다는 걸 명확히 알고 이제 다시 믿음을 중심에 뒀으면 하는 바람뿐입니다.”

글 조국현·사진 이병주 기자 joj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