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 스토리] ‘꽃게잡이 청년’ 남현봉씨, 김인혜 서울대 교수와 듀엣 무대 서다
입력 2010-10-27 18:12
1만5000 관객… 당신은 ‘테너 남현봉’
꽃게잡이 폴 포츠 남현봉(29)씨가 서울대 김인혜(48) 교수와 첫 듀엣 무대에 섰다. 지난달 SBS 프로그램 ‘놀라운대회 스타킹‘에서 김 교수가 남씨에게 무대를 약속한 지 한 달여 만이다. 남씨는 장래가 촉망되던 성악도였지만 어머니의 병환과 어려운 가정 형편 등으로 꿈을 접고 고향 전북 선유도에서 꽃게잡이 어부로 살았다. 그 사연이 스타킹에서 방영됐고, 이 프로그램에 출연한 김 교수가 그에게 듀엣 공연을 약속했다.
지난 24일 저녁 7시 서울 명일동 명성교회 본당은 차고도 넘쳤다. 1만5000여명이 몰려들었다. 남씨가 서 본 무대 중 가장 큰 무대다.
남씨는 컨디션 난조를 걱정했다. 몸 상태에 따라 발성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전날 군산 앞바다 선유도에서 배를 타고 전주로 나와, 주일 아침 청년성가대 지휘를 마치고 5시간 30분을 운전해 곧바로 무대에 서야 했기 때문. 김 교수도 힘들기는 마찬가지. 23일 대구에서 오페라 공연을 마치고 주일 또 다른 교회에서 찬양을 한 뒤 저녁 무대에 선다는 김 교수의 목소리는 칼칼했다. 하지만 둘은 언제 그랬냐는 듯 무대에서 카리스마를 내뿜었다. 앙코르곡 ‘넬라 판타지아’(영화 ‘미션’ 주제곡)는 환호에 묻힐 뻔했다. 그리고 ‘나 가진 재물 없으나’로 시작되는 ‘나’는 데뷔곡으로 남씨 인생의 모멘텀이 됐다.
다 접은 꿈
“그만두면 될 거 아냐. 다 그만둬.”
지난해 봄 오페라 가수, 뮤지컬 배우를 갈망하던 현봉씨가 꿈을 접었다. 지방대 성악과 출신으로는 도저히 뚫을 수 없는 중앙의 벽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았던 현봉씨였다. 지역 합창단에 들어가라는 주위의 권유에 “그럴 거라면 애초에 성악을 시작도 하지 않았다”고 큰소리치던 그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가족이 보증을 잘못 서 빚더미에 앉은 것도 모자라 어머니의 디스크 판정 그리고 수술로 이어지는 시련. 아픈 몸을 이끌고도 꾸역꾸역 바닷일에 나서는 어머니를 말리려고 어부의 삶을 시작했다. 노래하지 말라던 부모는 아들이 섬에 남는 것도 원치 않았다. 그저 번듯한 직장 잡아 장가가서 아들딸 낳고 살길 바랐다.
아들은 섬에 남았다. “음악가 집안에서 음악가 나온다면서요. 어부 집안에서 어부 나는 게 뭐가 어때서 그래요.” 어머니는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남씨는 바닷바람에 눈물을 씻어가며 그물을 건져 올렸고, 해질녘 갯바위에 홀로 올라 노래로 포효했다.
지난 1월 그렇게 꿈을 접고 친구의 배에 올라탄 것이다. 그간 노래해서 모은 500만원은 그물이며 온갖 장비 구입에 쏟았다. 평생 어부로 살겠다고 작정한 순간이다.
고향 친구의 깜짝 선물
그런데 친구가 일을 냈다.
며칠 전부터 배 안에서 카메라를 들이대고 자신의 노래를 녹음하던 친구 이정현(29)씨. 이씨의 계획은 노래와 영상을 CD에 담아 현봉의 생일 때 깜짝 선물로 ‘빵’ 터뜨리려는 것이었다. 그런 이씨가 돌연 마음을 바꿔 방송사 게시판에 영상을 올려버렸다.
“새벽 5시에 누가 막 흔들어 깨워서 일어났어요. 참 이상하더라고요. 일종의 예시 같은 거예요. 좀 있더니 SBS 작가라면서 전화가 와요. 오전 10시쯤 도착할 거 같다면서요.”
아침 댓바람부터 무슨 장난전화인가 싶어서 이씨에게 물어봤더니, 이씨가 그제서야 “사실은···”이라며 실토했다.
이틀 뒤에 녹화 제의가 들어왔고, 부랴부랴 서울로 올라갔다. 작업복 차림으로 ‘지금 이 순간’(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 중)과 ‘넬라 판타지아’ 등을 불렀다.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르는 건 순식간이었다. 담당 PD도 놀라기는 마찬가지. 곧바로 2회 제작에 들어갔고, 그때 서울대 성악과 김인혜 교수가 남씨의 ‘구원투수’로 섭외됐다.
“촬영 전에 현봉씨를 두 번 만났어요. 사실 대학에 있는 사람으로 예능 프로그램 나가야 할지 갈등이 되더라고요. 하지만 현봉씨의 사연을 접하고 노래까지 들어보니 아 이거다 싶었어요. 도와야죠.” 줄리아드 음대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은 동양인이자 뉴욕타임스가 극찬한 목소리의 주인공인 김 교수의 예술 감각은 꽃게잡이 청년의 재능을 끄집어 냈다. 남씨의 이름은 다시 검색어 1위에 올랐다.
남현봉의 멘토 김인혜
김 교수는 그 이후 현봉씨의 멘토를 자청하고 나섰다.
‘남현봉 띄우기’라면 모든 걸 감수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나도 어렵게 공부했기에 현봉씨의 얘기가 남 일 같지 않았다”는 그녀다.
둘은 닮은꼴이다. 각각 장남, 장녀에 생활고라는 환경적 제약, 그리고 예술적 끼를 물려준 아버지까지.
“나는 정말로 찢어지게 가난했어. 말도 마. 옛날에 청계천에 살았다고 하면 다들 알아. 빈민층이지. 난 전태일씨 분신하는 것도 목격한 사람이야.”
“섬에서야 빚 안 진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어려운 건 사실이지만. 저흰 그 정도는 아니에요.”(웃음)
“그래서 내가 강단에서 학생들한테 얘기하면 아무 소리 못하는 거야. 더한 사람은 없거든.”
아버지 얘기가 나왔다.
“우리 아버지는 사진사. 산에 가면 사진 찍어주는 그런 분들 알죠? 근데 집에 돈을 안 가져오는 분이었어요. 남들 퍼주느라고.”
그래도 딸의 재능을 제일 먼저 안 사람이 김 교수의 아버지다. “여섯 살 때부터 내가 KBS 어린이 합창단에서 노래했거든. 아버지가 한 거죠.”
장남인 현봉씨도 “우리 아버지는 제가 봐도 참 신기해요”라며 운을 뗐다. 어부인 아버지는 독학으로 기타를 쳤고, 색소폰을 불었고, 피아노를 치다 교회 반주자가 됐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음악을 가르쳐주진 않았지만 쉼 없이 보여줬고 들려줬다.
“현봉이는 어떻게 MR(Music Recorded: 반주음악)을 그렇게 잘 잡니?” 김 교수가 말했다. 음역을 자유롭게 넘나든다는 칭찬이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재능 중 하나다.
어머니들은 그렇게 울며 기도했다.
“우리 어머니는 새벽제단 쌓는 어머니였어요. 대대로 우리 어머니의 어머니, 또 그 어머니의 어머니도. 현봉씨 어머니가 울면서 기도하셨다는 얘기 듣고 내가 얼마나 감사했는지 몰라요.”
“우리 어머니는 제 얘기만 나오면 그렇게 우세요. 저도 어머니 얘기만 하면 눈물이 나오고. 어머니랑 저 사이엔 뭔가가 있어요. 서로 말은 안하는 데 뭔가가.”
차이가 있다면 김 교수는 일찌감치 재능이 발견돼 서울 음대-미 줄리아드 음악원-서울대 교수까지 성공가도를 달린 반면, 현봉씨는 지방 음대를 나와 꿈을 펼쳐보지 못한 채 꽃게잡이 배를 탔다는 것이다.
고등학생 때 득음(?)
남씨의 숨은 실력이 공개된 때는 고 2때 노래방에서였다. “김경호의 ‘금지된 사랑’을 불렀는데 난리가 난 거예요. 아시죠? ‘널 사랑해’ 하고 부르는 거요.” 금지된 사랑을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면 ‘득음’ ‘초고음 샤우팅’이란 연관어가 나온다. 그때까지만 해도 남씨는 노래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중학교 때부터 교회에 다니면서 매주 찬송가를 불렀던 게 연습이라면 연습일까. 따로 노래를 부른 적도 없었다. 소문은 발보다 빨랐다. 교내 행사는 물론이고 고등학교 축제마다 불려 다녔다.
그러다 교회에서 군산시립합창단원인 성악가를 만났다. 그 앞에서 처음 부른 노래는 ‘나’. 성악 발성을 흉내만 내봤다. “너 서울대 갈 수 있겠다.”
가족의 반응은 차가웠다. 예술을 하면 가난해진다는 게 반대 이유였다. 남씨는 뜻을 굽히지 않았고 주 1회 4개월 레슨비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4개월 연습으로 서울 음대에 진학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전주대 원광대 전북대 3군데에 원서를 넣었고 모두 합격했다.
전주대 성악과 재학 시절 메이저 무대에 서고 싶어 수없이 서울을 오갔다. 대학 선배 출신 중 성공한 테너를 찾아가 개인 레슨을 부탁했다. “1000만원도 넘게 깨졌어요.”
하지만 정작 주어지는 기회란 전라도를 넘어서지 못했다. 졸업 무렵 그에게 들어온 제안은 지방의 합창단원. “교수님, 저는 합창단원 하려 했으면 애초에 성악을 시작하지도 않았어요. 아시잖아요.” 줄기차게 오디션에 도전했지만 2차에서 늘 낙방이었다.
전주의 카레라스
현봉씨에겐 꽃게잡이 폴 포츠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영국인 폴 포츠는 정규 교육을 받지 않고 스스로 성악 발성과 노래를 익힌 역경의 스타다. 현봉씨는 성악과를 나온 정통파다.
“지금 성악 발성을 기초부터 배운다는 건 제겐 맞지 않는 얘기고요···.”
김 교수에게 레슨을 받게 되느냐는 질문에 돌아온 답변이다. 내심 폴 포츠와의 비교가 마뜩찮은 눈치다.
김 교수는 현봉씨의 목소리를 “대단한 미성”이라고 평가했다.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 이른바 3테너 중에 “현봉씨는 호세 카레라스”라고도 치켜세웠다. “아주 세련된 목소리 있죠. 그런 목소리예요.”
사실 현봉씨는 파바로티를 동경했다. 대학 2학년 때 카세트테이프가 늘어지도록 파바로티 노래를 들었고, 파바로티처럼 되겠다고 몸무게를 무려 19㎏이나 찌웠다. 60㎏ 초반대 몸무게는 80㎏에 육박했다. 성량은 풍부해졌다. 하지만 모습은 ‘건달’에 가까웠다.
“외모는 포기했죠. 금팔찌 두르고 검은 정장 입고, 깍두기 머리를 해봤더니(웃음). 아휴 그때 건달 안 된 게 천만다행이죠.”
살은 군 입대와 함께 쏙 빠졌다.
현봉을 추종하는 전도사
그는 전주 일대에선 이미 유명 인사다. 대학 시절부터 행사장을 다니며 용돈을 벌었다. 한 달 150만원은 금세였다. 전주 유상교회 찬양대 지휘자로 지역 교계에서도 소문이 나 있었다. 추종자들도 있다. 순박한 섬 총각으로만 비쳐진 현봉씨는 알고 보면 ‘그루밍족’이다. 세미정장을 즐겨 입고 샤기컷 헤어스타일을 고수한다. 성대모사에도 능하고 유머감각도 뛰어나 그를 따르는 후배들도 많다.
전주 서광교회의 한 전도사는 현봉씨처럼 입고 말하고 행동하는 대표 추종자다. 전도사의 노래 실력은?
“방송에서 음치탈출 프로젝트를 한다기에 제가 대신 신청해줬어요. 거의 붙었다고 하더라고요.”
방향은 다르지만 어쨌든 전도사도 현봉씨처럼 방송에까지 나올 분위기다.
그에게 음악은 마음이다. 미치도록 사랑을 해봐야 절절한 사랑 노래를 부를 수 있고, 대자연의 풍광을 가슴에 담아봐야 인생을 노래할 수 있지 않겠냐는 게 남씨의 생각이다. 방황의 세월이 결코 헛되지 않다고 믿는 이유다.
“교수님께도 물어보세요. 같은 말씀 하실 거예요.”
김 교수도 동의했다. “‘수퍼스타 K’의 허각이나 폴 포츠, 남현봉이 주는 메시지가 뭘까요. 바로 스토리예요. 전 세계 60억 인구가 열광하는 대상은 부잣집에서 편안하게 자라 성공한 사람이 아니에요.”
다시 섬으로
“누가 그래요 저더러 천운이 왔다고. 사실 방송 나가고 알아보는 사람들도 생기고 부모님도 기뻐하시고, 섬사람들도 좋아하고 하니까 좋죠. 그렇다고 마냥 좋은 것만도 아녜요.”
방송 출연 후 트로트 음반 취입 제의를 비롯해 이런저런 기획사에서 연락도 왔고, 타 방송사 섭외도 들어왔지만 남씨는 다시 섬으로 내려갔다.
“모처럼 기회가 왔는데 저도 잡고 싶죠. 하지만 이 건 아니다. 내 일은 마무리 해야겠다 생각이 들더라고요. 무엇보다 제가 배에서 빠지면 제 친구가 생업을 그만둬야 하거든요.”
그래서 다시 2개월여 동틀 무렵부터 해질녘까지 친구와 꽃게를 잡았다.
명성교회에서의 공연을 마치고 25일 다시 섬으로 내려간 현봉씨.
“바닷일은 아마 못하게 될 거 같아요. 친구한테도 다시 한번 세상으로 뛰어들어 보자고 했어요.”
가수 남현봉
현봉씨가 오랜 망설임 끝에 결단을 내렸다.
“현봉이는 이제 가수예요. 저도 아직까지 이메일에 ‘소프라노 김인혜입니다’라고 붙이지만. 사실 가수죠. 현봉이도 저처럼 노래로 길을 열어갈 거예요.”
김 교수는 남씨와 함께 무대에 서는 것은 물론이고 남씨만의 무대도 마련해줄 계획이다. 음반 발매도 서두르려고 한다. 김 교수는 꽃게잡이 청년에게 다시 가능성을 열어줬고, 그 청년은 이제 마음을 다잡고 꿈을 향해 걸음을 뗐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걸 갖게 하셨네∼’(‘나’ 중에서). 10여년 전 남현봉씨를 성악에 입문시켰던 그 노래가 다시 잊혀진 그의 꿈을 불태우는 오늘이다.
글 이경선·사진 김지훈 기자 boky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