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김진홍] 입은 재앙의 문이라는데…
입력 2010-10-27 18:07
“풍파 일으키는 정치인의 가벼운 말(言)… 언제까지 반복될 지 안타까워”
짧은 시간이지만, 엘리베이터 안에서 인내심을 시험당하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동승객 가운데 큰소리로 얘기를 나누는 수다쟁이들이 포함돼 있을 때가 그렇다. 엘리베이터가 사람들도 거의 꽉 찬 상태에서 아리송한 신조어나 비속어가 내 머리 위를 오고가면 감내해야 할 고통은 더 커진다. 인간의 기본권인 표현의 자유가 타인에게 불편을 줄 수 있다는 당연한 이치를 새삼 절감하는 순간이다.
‘말(言)’ 하면 뺄 수 없는 곳이 정치권이다. 대중의 인기를 먹고 살아야 하는 숙명(?)으로 인해 정치인들은 말을 많이 할 수밖에 없다. 상대 정파보다 지지 세력을 더 모으기 위해 직설적이고 원색적인 발언은 물론 감언이설도 마다하지 않는 이들이 정치인이다. 인기영합주의라는 비판이 쏟아져도 표를 얻는데 득이 될 것이라는 판단만 서면 비판을 무시하는 속성을 갖고 있다. 유명 정치인이라면 대개 한두 번씩 설화에 휩싸인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일반인과 달리 정치인의 말은 이따금 엄청난 파장을 낳는다. 최근의 사례로는 민주당 박지원 원내대표의 ‘이명박 정부는 한반도 평화 훼방꾼’ 발언을 들 수 있다. 중국의 차기 지도자가 연관된 민감한 사안을 박 원내대표가 불쑥 꺼내자 청와대가 발끈한 데 이어 중국 외교부의 부인(否認)과 중국 정부에 대한 우리 외교부의 유감 표명 등 적지 않은 후폭풍을 야기했다. 누가 거짓말쟁이인지 진실은 오리무중인데 유야무야 마무리돼가는 양상이어서 뒷맛이 영 씁쓸하다.
이번 파문의 진행 과정에 등장하는 정치인들의 면면을 보고 있노라면 헛웃음이 나온다. 박 원내대표를 비난했거나 감싼 정치인들도 예전에 설화를 겪은 적이 있어서다.
박 원내대표를 강하게 압박한 한나라당 안상수 대표의 경우 여당에 비우호적인 특정 사찰의 운영 방식과 관련해 외압을 가했다는 논란에 휩싸여 곤욕을 치른 바 있다. 아동 성폭행범이나 흉악범이 많아진 이유가 ‘좌파정권’ 10년간의 편향된 교육 때문이라는 그의 말을 놓고도 논란이 벌어졌다. 한나라당 김무성 원내대표는 20, 30대 유권자들을 “아새끼”라고 표현했다가 사과해야 했다.
박 원내대표를 옹호한 민주당 손학규 대표는 노무현 정부 때 노 전 대통령에게 ‘경포대(경제를 포기한 대통령)’라고 공격했다가 홍역을 치렀다. 앙금을 씻기 위해서인지 손 대표는 이달 초 대표에 취임하자마자 봉하마을에 가 노 전 대통령에게 고개를 숙였다.
‘평화 훼방꾼’ 공방 와중에 불거진 김황식 총리 발언을 둘러싼 논란 과정도 모양새가 나쁘다. 김 총리가 과잉복지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노인들의 지하철 무임승차에 반대한다고 언급한 것이 화근이 됐다. 오해의 소지가 없지 않지만, 부유한 노인에게까지 지하철 무료 탑승권을 주는 건 문제가 있다는 김 총리 발언에 수긍되는 면이 있다.
그럼에도 민주당은 박 원내대표 발언으로 인한 곤궁에서 벗어나려는 듯 대표와 사무총장, 정책위의장, 대변인 등이 총동원돼 “노인들의 쌈짓돈을 빼앗자는 한심한 발상”이라느니 “노인들을 구박한다”는 등 거세게 몰아쳤다. 몇 년 전 노인 폄훼 발언으로 여론의 몰매를 맞았던 정동영 최고위원도 가세했다. 김 총리가 부랴부랴 대한노인회에 사실상 사과하자 사태는 진정됐다. 그러나 신중치 못한 말 한마디가 풍파를 일으킨다는 점을 재확인시킨 케이스다.
정치인의 절제되지 않은 말로 촉발된 정치권의 격한 말싸움은 대부분 무익하다. ‘평화 훼방꾼’과 ‘노인 지하철 무임승차 반대’ 공방에서도 유익한 구석을 찾기 어렵다.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이를 지켜봐야 하는 민초들은 짜증스럽다. 여론이 등을 돌리면서 앞뒤 가리지 않고 모진 말을 내뱉은 당사자가 치명상을 입기도 한다. ‘입은 재앙의 문이요, 혀는 몸을 자르는 칼’이라는 경구가 나온 이유다. 당장의 소리(小利)를 탐하느라 가벼운 말로 화를 자초하는 무모함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우리 정치권의 수준이 안타깝다.
김진홍편집국부국장 j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