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팔경 가을여행… 단풍 물든 ‘사인암’ 퇴계·두향 그리움만큼 붉구나

입력 2010-10-27 17:40


단양(丹陽)의 단풍은 퇴계를 향한 관기(官妓) 두향의 단심(丹心)만큼이나 붉다. 퇴계 이황은 1548년에 단양군수로 부임한다. 이때 퇴계의 나이는 48세. 9개월이라는 짧은 재임기간에도 불구하고 퇴계는 단양의 풍광에 반해 곳곳을 유람하며 단양팔경을 선정하고 이를 주제로 40여 편의 주옥같은 시를 남겼다. “산은 단풍잎 붉고 물은 옥같이 맑은데/석양의 도담삼봉엔 저녁놀 드리웠네/신선의 뗏목을 취벽에 기대고 잘 적에/별빛 달빛 아래 금빛파도 너울지더라”

단양팔경 중 제1경인 도담삼봉의 가을 풍경을 읊은 퇴계의 시다. 남한강 상류의 푸른 강심에 그림자를 드리운 도담상봉은 조선 개국공신인 정도전의 유년시절을 지켜본 벗이자 퇴계의 시심을 자극한 명승지. 퇴계를 비롯해 정도전 정약용 김병연(김삿갓) 등이 도담삼봉에 반해 남긴 시가 131수나 전한다.



도담삼봉은 하루에도 몇 번씩 표정을 달리한다. 이른 아침 남한강에서 피어오른 물안개가 스러지면 육지 속의 섬인 도담리의 가을풍경이 도담삼봉의 캔버스를 자처한다. 노를 저어 안개 속을 빠져나오는 도담리 노인은 퇴계의 시에 나오는 신선과 같다. 석양에 단풍잎처럼 붉게 물든 도담삼봉이 어둠 속으로 침잠하고 달빛과 별빛이 남한강 수면에서 금빛으로 너울지면 도담삼봉은 황홀한 야경으로 거듭난다.

단양팔경 중 제2경인 석문은 도담삼봉 상류 200m에 위치하고 있다. 석문은 석회동굴이 붕괴되고 남은 동굴 천장의 일부가 구름다리처럼 남은 것. 돌단풍에 둘러싸인 석문 자체의 형태도 특이하지만 석문을 통해 보이는 남한강과 육지 속 섬마을로 불리는 도담리는 한 폭의 그림이다. 낚싯배를 타고 남한강에서 올려다보는 석문은 푸른 하늘에 걸린 무지개처럼 황홀하다.

퇴계 이황과 겸재 정선 등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글과 그림으로 찬사를 한 구담봉과 옥순봉은 장회나루에서 유람선을 타고 충주호를 미끄러져 가야 만날 수 있다. 그 옛날 나룻배를 타고 남한강을 건널 때보다는 운치가 덜하지만 색색의 물감을 풀어놓은 듯 단풍으로 물든 충주호는 절로 시심을 불러일으킨다.

장회나루 건너편의 15m 높이 바위는 강선대. 퇴계와 두향이 강선대에 올라 시를 짓고 거문고를 타던 곳이다. 퇴계가 풍기군수로 떠나자 두향은 관기에서 빠져나와 퇴계와 자주 찾았던 강선대 아래 남한강가에 움막을 짓고 평생 퇴계를 그리워하며 살았다.

어느 날 두향은 퇴계가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남한강에 몸을 던진다. 퇴계와 이별한 지 21년째 되던 해였다.

강선대 아래에 묻힌 두향의 무덤은 충주댐 건설로 수몰 위기에 처하자 강선대 위쪽으로 이장돼 퇴계가 잠들어 있는 안동의 하늘을 우러르고 있다. 퇴계의 마지막 말도 ‘매화에 물을 주어라’였다. 평생 매화를 두향과 동일시해 온 퇴계에게 매화는 곧 두향이고 두향은 곧 매화였다.

단양팔경 중 시인묵객들로부터 최고의 칭송을 받은 봉우리는 제4경인 구담봉으로 무려 158수의 시가 전해온다. 중국의 소상팔경이 이보다 나을 수 없다며 구담봉을 극찬한 퇴계가 시 한 수 선물하지 않았을 리 없다. “구담을 지나는 새벽 달은 산에 걸려있어/그 곳을 상상하니 뵐동말동 아득하이/주인은 이제와서 다른곳에 숨었으니/학과 잔나비 울고 구름만 한가하네”

유람선이 가까이 다가갈수록 구담봉은 더욱 웅장해진다. 병풍을 닮은 바위절벽과 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는 겸재 정선의 ‘구담도’를 빼닮았다. 푸른 호수에서 일렁이는 구담봉 그림자를 지우며 구담봉 모퉁이를 돌자 멀리 옥순봉이 모습을 드러낸다.

제4경인 옥순봉은 희고 푸른빛을 띤 바위들이 힘차게 솟아 마치 대나무싹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두향은 퇴계에게 옥순봉을 단양에 속하게 해달라는 청을 넣었다. 하지만 청풍부사가 거절하자 퇴계는 석벽에 단구동문(丹丘洞門)이라는 글을 새겨 단양의 관문으로 정했다는 사연이 전해진다.

크고 작은 암봉을 차례대로 쌓아 놓은 듯한 옥순봉은 구담봉보다 규모는 작지만 입체감이 도드라진다. 퇴계는 이 풍경울 보고 “매어달린 듯 깎아지른 절벽은 하늘에 오르려하고/새로 갈은 장검은 경중에 꽂혔더라/누가 달 여울에 가로 앉아 시선을 부를 것이며/늦게 취하여 신공의 묘함을 알 수 있으랴”고 노래했다.

단양팔경 제5경인 사인암은 하늘을 닮아 더욱 푸른 계류가 기암절벽을 안고 휘도는 운선계곡에 위치하고 있다. 마치 해금강을 옮겨놓은 듯 하늘을 향해 뻗은 붉은 암벽과 중력의 법칙을 무시한 채 수직의 바위 틈새에 뿌리를 내린 노송은 세상 어떤 조각가도 흉내 낼 수 없는 신기의 결정체다. 오죽했으면 조선 최고의 화원으로 불리는 단원 김홍도가 사인암을 화폭에 담으려 붓을 잡았다가 1년여를 고민했을까.

선암계곡을 거슬러 오르며 만나는 하선암(제6경), 중선암(제7경), 상선암(제8경)도 선경의 연속이다.

색색의 물감을 흩뿌린 듯 단풍에 물든 선암계곡을 배경으로 여인의 피부처럼 매끄러운 기암괴석이 산수화를 그리는 곳. 그곳은 대한민국 녹색 쉼표로 불리는 단양의 산과 강이다.

단양=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