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임순만] 편안한 것들

입력 2010-10-26 17:53

하얀 노인이 병상에 누워 있다. 큰 수술을 받은 후 1년 넘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중이다. 나날이 기진해가는 노인은 어떤 날에는 유동식(流動食)마저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시원한 냉수 한 컵을 마시지 못하는 날도 있다.

젊었을 때 그는 한 모임의 총무를 맡아 20년 가까이 그 모임의 살림을 꾸려 왔다. 그 모임에서 받은 감사패에 1970몇 년부터 1990몇 년까지 총무로 헌신했다고 분명하게 숫자로 적혀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런 성실한 일꾼에게도 어느 날인가 찬물 한 대접을 벌컥벌컥 마시지 못하는 때가 온다는 것을 보는 것은 충격이다. 누구에게나 그런 날은 온다. 노인이 누워 있는 병상 너머로 가을의 공원이 펼쳐져 있다.

그에게 찾아오는 사람이 적지 않다. 문병객들이 그의 손을 잡아준다. 많은 손을 만나온 그가 어느 날 가까운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누구의 손이 진심으로 잡아주는 것인지, 그냥 건성으로 잡아주는 손은 어떤 것인지 다 알 수 있다”고.

그 이야기를 듣고 생각해본다. 어떻게 진심은 전달되는가.

누구나의 손은 표정을 가지고 있다. 억센 손이 있고 연약한 손도 있다. 누군가는 손이 차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따뜻하다고 말한다. 그런 다양한 표정 중에서 퍽이나 순연(純然)해서 잠시 손길이 머무르는 동안 편안한 느낌으로 서로의 마음이 교감되는 손. 그런 손은 다른 사람이 겪는 고통의 정서적 상태로 들어가 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인 것처럼 느끼는 마음에서 나올 것이다.

미국의 사회학자 제러미 리프킨은 최근 국내에 번역 출판된 ‘공감의 시대’에서 “수동적인 동정과는 달리 공감은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이루어진다. 공감의 확장은 갈수록 복잡해지는 사회적 교류와 인프라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접착제다”라고 말한다.

몇 년 만에 논설위원으로 돌아왔다. 좀 낯설고 이물스러움을 느낀다. 가끔 도움말을 주는 한 지인이 이런 메시지를 보내준다. “논설을 하려거든 내용도 좋아야겠지만 무엇보다 편안한 느낌을 주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지식 제일주의 시대, 남과 다르고 멋져보여야 하는 스타일의 시대에 편안함을 강조하는 그의 충고를 곱씹어본다. 쉬워 보이지만 실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상대방에게 편안한 느낌을 준다는 것, 깊은 병석의 노인마저 단숨에 척 알아보게 되는 것, 최고 경지의 주문이라고 깨닫는다. 공감이 확대될 때 편안함을 느낀다.

임순만 논설위원 so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