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작가 김아타, 미술사의 첫 실험… 2년간 ‘자연이 그린 예술’을 기다린다
입력 2010-10-26 17:35
세계적인 사진작가 김아타(54)의 행보가 심상치 않다. 2007년 빌 게이츠가 그의 작품을 구입했다고 해서 유명세를 치른 김아타는 요즘 해외를 수시로 드나들면서 뭔가 ‘큰일’을 꾸미고 있는 모양인데 뜻밖에도 손엔 작업도구인 카메라가 들려 있지 않다. 무슨 비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것일까. 지난 주말 인도에서 돌아온 그를 만났다. 악수를 청하며 짓는 특유의 너털웃음이 호쾌한 그의 캐릭터를 말해준다.
“인도문명을 상징하는 갠지스와 보드가야를 다녀왔어요. 두 곳에 하얀 천의 캔버스를 세웠지요. 사계절을 두 번 정도 지날 때까지 캔버스를 세워두면 비바람을 맞으며 시공간이 어우러진 세월의 흔적을 남기겠지요. 드로잉 오브 네이처(Drawing of Nature), 자연이 스스로 그린 그림이라고나 할까요. 순간순간의 시간을 담아내는 사진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는 프로젝트입니다.”
전 세계 주요 도시와 자연, 문명과 역사가 깃든 지역에 185×140㎝ 크기의 캔버스를 2년 이상 설치하는 작업으로 동서양 미술사를 통틀어 처음 시도하는 야심작이다. 캔버스엔 봄 여름 가을 겨울 자연과 환경의 변화만으로 흔적이 남게 된다. 지금까지 한국과 미국 일본 중국 인도 러시아 등 역사적 의미가 있는 장소 15곳에 캔버스를 설치했으며 추후 50여곳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25년 동안 사진작업을 해왔던 그가 카메라를 잠시 내려놓고 전무후무한 이 실험에 뛰어든 이유는 무엇인가. “수 천, 수 만 컷의 필름에 담아낸 작업이 결국에는 변화무쌍한 자연과 귀결된다는 겁니다. 변화하는 자연과 환경에는 그 지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별의별 것이 다 녹아 있어요. 이를 캔버스라는 미술장치를 필터로 삼아 걸러내는 것이죠.”
곳곳에 세워진 캔버스는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눈에 보이는 것은 없고 자연 그대로의 흔적만 남은 추상회화가 될 듯하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너와 나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같지만 산소와 질소 등 입자들이 밀도있게 가득 차있거든요. 미처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하고 생각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게 하는 작업입니다.”
사과나무를 심듯이 지구 곳곳에 캔버스를 심는 작업, 예술이라는 깃발을 꽂는 작업이라는 그는 “이제 가진 것이 있다면 다 버려도 좋다”며 마치 구도자로서의 각오를 다졌다. 여러 국가의 민감한 지역을 거치는 작업과정에서 숱한 에피소드를 겪었고 희비가 교차하는 순간도 많았다. 첫 번째 캔버스는 올해 초 미국 뉴욕 루빈미술관 옥상에 세웠다. 뉴욕이 세계 현대미술의 거점이자 자신의 이름을 알린 작업의 무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심의 건물 옥상에 커다란 캔버스를 설치하기까지 행정기관은 물론이고 경찰과 소방당국의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했다.
시베리아 자작나무 숲에 캔버스를 세우는 작업은 환경이나 기후 등도 문제지만 기껏 세워놓으면 동물들이 훼손하기 때문에 넘어지지 않도록 받침대를 단단히 고정시키는 게 급선무였다. 전쟁의 폐해가 남아있는 일본 히로시마에서는 원자폭탄 투하의 아픔을 어렴풋하게나마 담아내기 위해 경도와 위도, 바람세기 등을 면밀히 조사해 평화의돔 부근에 캔버스를 세웠다.
노장사상의 발원지인 중국 허난성에서는 지역 주민들의 찬반토론이 열린 후에야 설치가 가능했다. 지금은 주민들이 캔버스 주변을 오가며 상황을 메모로 남기는 등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미국 산타페 오키프미술관 부근, 여류화가 조지아 오키프(1887∼1986)가 캔버스를 세우고 그림을 그리던 지점에서 작업할 땐 같은 예술가로서 감회에 젖기도 했다.
강원도 인제 향로봉과 곰배령 등 DMZ 지역이나 전북 부안 위도 등 군사적으로 민감한 지역에 설치한 한국에서의 작업도 만만치 않았다. 군사지역에서는 국방부와 환경부, 산림청 등 관계부처의 허가를 얻어야 했다. 향로봉에서는 국방부 장관의 직인이 찍힌 허가서를 받아냈지만 현지 행정 책임자의 제지로 애를 먹다 겨우 캔버스를 세우는 데 성공했다고.
숲 속에 홀로 선 흰 캔버스에는 바람의 힘을 빌린 낙엽이 내려앉고, 세상을 하얗게 만드는 눈이 쌓이고, 파릇파릇 솟아나는 생명들의 봄소식이 전해진다. 또 작열하는 태양과 마주하다 다시 거센 폭풍을 만날 것이다. 캔버스가 내는 소리가 아침을 깨우고 온갖 종류의 곤충들이 색다른 공간을 즐기는 자체가 예술행위다. 이를 통해 전쟁의 상흔이 자연의 속삭임에 녹아들어 평화가 깃드는 작품이라는 설명이다.
현재 3분의 1 정도 작업이 진행됐지만 정작 문제는 지금부터다.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 바그다드와 아프가니스탄 등도 난관이 예상되지만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곳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DMZ 내 포사격장이다. 죽음과 공포의 아우성이 아직도 생생한 아우슈비츠는 각종 채널을 통해 접근했지만 폴란드 정부가 “어떤 행위로도 그날의 상처를 치유할 수 없다”며 거절해 쉽지 않다.
포사격장 작업은 캔버스를 포 타깃으로 세우는 프로젝트다. 포사격이 가해지면 캔버스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는 “물론 잿더미만 남겠지요. 이것을 부스러기 하나라도 남김없이 수습해서 복원시키는 작업을 진행할 겁니다. 귀를 찢는 포사격장의 소리와 포탄에 맞아 찢어지고 깨지고 부서지는 것을 오롯이 담아내는 작업이 의미심장하지 않아요?”
그의 이런 일련의 작업은 ‘대지미술’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그는 이에 동조하지 않는다. “대지미술은 작가가 자연을 옮기거나 활용해 작업하는 것이고, 이번 드로잉 오브 네이처는 자연이 스스로 예술활동을 한다는 점에서 완전히 다른 것이죠. 자연이 그려내는 예술이 지구환경을 가늠하고 인류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는 점을 얘기하고 싶어요.”
“자연이 그린 예술”이라는 대목에서 “예술은 사기다”라는 백남준의 말이 떠올랐다. 아직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으니 뜬구름 잡기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는 “백남준의 사기론은 잘못됐다. 이 발언으로 예술은 병들어버렸다. 대중을 생각하는 작가는 죽은 아티스트다. 아무것도 없는 자연상태로 돌아가는 동양사상이 내 작업의 뿌리이자 핵심”이라고 반론했다.
그의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에 세계 유수의 미술관이 전시를 유치하기 위해 물밑 작업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2년의 세월이 지나 작품이 완성될 때 국내외 미술계의 반응이 어떠할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숱한 역경을 겪고 국제 스타작가로 우뚝 선 그는 그동안의 감회를 묻자 “미술계 제도에 대해 할 말은 많지만 아직 때가 아니다”며 손을 내저었다.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