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전 충격적 살인사건… 그리고 드러나는 은밀한 사랑

입력 2010-10-26 21:34


한 가지 일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일은 흔하다. 그리고 개개의 모든 사건은 우리 인생에 조금씩 영향을 주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사건을 계기로 인생 전체가, 인생을 규정할 생각이 송두리째 바뀌는 경험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아르헨티나 영화 ‘엘 시크레토 : 비밀의 눈동자’는 하나의 사건으로 운명이 바뀐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1975년 사건 처리로 잔뼈가 굵은 검찰 수사관 벤야민 에스포지토(리카르도 다린) 앞에 대학을 갓 졸업한, 아름다운 젊은 여자 상관 이레네(솔레다드 빌라밀)가 나타난다. 공교롭게도 그녀의 등장과 함께 평생 잊지 못할 사건을 맡게 된 벤야민은 도착한 강간살인 사건 현장에서 널브러진 젊은 여자의 시신과 환하게 웃고 있는 그녀의 사진을 발견한다.

숨어버린 범인, 사건 해결엔 관심이 없는 판사, 방해만 하는 경찰. 수사는 성공할 수 있을까? 백방의 노력 끝에 벤야민과 동료 수사관 산도발, 이레네는 진범을 잡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공권력과 결탁한 범인은 곧 풀려나 버리고, 피해자의 남편 모랄레스는 휘두를 분노의 대상도 없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좌절감만 느낀다 . 모랄레스의 공허한 표정 앞에서 벤야민과 이레네는 그저 무력하다. 풀려난 범인은 곧 또 다른 비극의 씨앗이 된다.

그러나 영화의 진짜 이야기는 그로부터 25년 후 펼쳐진다. 은퇴한 벤야민이 이레네를 만나 자신이 쓴 소설을 보여주며 새로운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 과거와 현재가 여러 번 교차하고, 25년이라는 공백이 바짝 늙어버린 등장 인물들의 얼굴을 통해 드러난다. 벤야민의 소설 속에서 정의는 결국 제대로 집행되지 않은 채 결말을 맺는다.

그러나 그 순간. 모랄레스를 찾아간 벤야민은 지난 25년 동안 자신이 생각해왔던 인생을 뒤집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목격하게 된다. 그들의 주름과 흰 머리 속에서 강산은 변했지만, 누군가에게 25년은 흘러간 세월이 아니라 정지해버린 현재였다. 모랄레스의 숨은 비밀이 오롯이 관객에게 드러나는 순간, 분노·연민·허탈감 등 여러가지 복합된 감정은 벤야민 뿐 아니라 영화를 보는 모든 이들에게 전해진다.

이야기의 큰 줄기가 조금씩 전모를 드러내는 살인 사건이 아니라, 사건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두 가지의 사랑이라는 게 특기할 만하다. 촉망받는 젊은 여성 법조인과 나이든 수사관이라는 신분 차이에 가로막힌 벤야민의 사랑과, 부인의 죽음으로 멈춰버린 모랄레스의 사랑은 25년 후 어떻게든 결말을 맺게 된다.

불같은 사랑을 물같이 흐르는 세월에 숨긴 남자가 내비치는 표정과, 열정적이고 뜨겁던 사랑이 울분 속에서 차갑게 굳어지며 증오로 변하는 과정을 영화는 과장하지 않고 보여준다. 사랑과 정의, 모든 영화가 수천 번 울궈먹은 진부한 화두를 이토록 세련되고 아름답게 그려낸 후안 호세 캄파넬라 감독에게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하얀 리본’을 제치고 2010년 아카데미영화상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해 화제를 모은 작품이기도 하다. 다음달 11일 개봉.

양진영 기자 hans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