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훙장-위안스카이의 전보 내용에 담긴 동학농민혁명… 고종은 두려워했고 淸은 日을 오판했다

입력 2010-10-25 21:25


청과 일본의 개입으로 끝난 동학농민혁명은, 왕조국가 조선이 더 이상 국가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의 파병요청을 통해 자국 내부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의지와 능력을 이미 상실했음을 보여주었다. 결과적으로는 조선의 식민지화를 가져온 청의 군사개입이 어떤 과정에서 이뤄졌는가를 보여주는 자료가 지난 22일 공개됐다. 한국사연구회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주최로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동학농민혁명 학술회의에서 베이징대 왕샤오치우(王曉秋) 교수는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리훙장전집’의 동학 관련 자료들을 새롭게 소개했다. ‘리훙장 전집’은 중국 청사편집위원회가 14년간 공들여 모은 리훙장 관련 사료를 모아 편찬한 것이다. 여기에는 기존 리훙장의 글들을 모은 ‘이문충공전집’에도 실리지 않은, 구한말 조선형세에 관련된 전보들이 망라되어 있다.

◇“조선 국왕, 두려워서 동학 정벌 못했다”=당시 중국의 외교·군사 업무를 총괄했던 권력자 리훙장과 조선에 파견된 위안스카이(袁世凱) 장군이 주고받은 전보들에는 동학농민혁명에 청이 개입하게 된 과정이 자세히 나와 있다. 다음은 본격적인 군사반란이 시작되기 전인 1893년, 위안스카이가 리훙장에게 보낸 전보로, 리훙장은 이 전보를 청의 외교전담부서였던 총리아문에 보냈다. “동학 사교 집단은 조선 국왕에게 양인들을 모두 몰아내라고 요구했다. (중략) 위안스카이는 여러 번 조선 국왕에게 저들을 엄히 정벌할 것을 권고했다. 결국 그들은 두려워서 감히 하지 못했다.”

이에 따르면 위안스카이는 조선에 대한 청의 군사개입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서양인들은 중국이 동학당을 진압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그러므로 속히 군함 2척을 인천에 보내어서 동학당을 진압하는 임무를 수행해주기를 바란다.”, “위안스카이가 기회에 따라 두루 방어하여 힘으로 막을 것을 모여서 의논하였다. 곧바로 위안스카이에게 전하여 조선군이 나아가 엄히 단속해 징벌해 줄 것을 간절히 부탁하였다.”

위안스카이가 동학군이 진격해오는 급박한 상황에 대해 리훙장에게 전보한 내용도 눈길을 끈다. “서울(漢城)의 사민들이 대부분 정부를 원망하고 있고 난을 생각하는 자가 열에 아홉은 된다. 이 무리들도 역시 대부분 한성 내에 잠복하고 있는데, 만약 (동학군이) 한성 근처를 침범한다면 곳곳에서 호응을 할 것이다”

◇청, 일본 파병 판단 못해=1894년, 동학군은 한때 전주성을 점령하는 등 기세를 올렸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홍계훈 장군에게 참패하고 청군과 일본군이 파병된 뒤(6월) 동학군엔 패색이 짙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청은 일본의 움직임을 잘못 판단했다. 4월 리훙장은 일본군의 동향에 대해 “위안스카이가 다시 전보를 보냈다. 강화도의 군대는 아직 전쟁을 하지 않았다. 왕은 스스로 전쟁을 할 의사가 없다. (중략) 일본이 군대를 파병한다는 소식은 아직 듣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위안스카이는 “일본 군대의 일들은 거의가 사관을 보호하는 명목으로 군대를 100여명 정도 한성에 보낸 것”이라고도 했다.

일본이 기회를 틈타 조선에 파병한 뒤에도 리훙장과 위안스카이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인과 중국인이 서로 체면을 다퉈 군대를 보냈지만 전쟁은 하지 않으니 놀라거나 두려워할 일은 아니다. 속히 전주의 비도들을 제거할 법을 만들어 전주성이 회복되면 중국군이 철수할 것이고 일본군도 저절로 없어질 것이다.”(위안스카이)

일본군이 철수할 기미가 없자 리훙장이 보낸 전보는 이렇다. “서울엔 일이 없고 전주성은 이미 회복돼 이미 외무관서에 힐문하고 아울러 각국 조사원이 조사해 힐문할 것을 청했다. 일본은 점차 군대를 증가시키고 있다. 공사관을 보호하는 뜻은 아닌 것 같은데 도대체 무슨 의도인가” 청은 일본의 의도를 몰랐고, 조선은 아무런 힘이 없었다.

결국 7월25일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청은 조선에 대한 모든 영향력을 잃었고, 조선은 급속히 일본의 식민지로 떨어졌다.

양진영 기자 hans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