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이용웅] 마음에 남는 기부와 상생
입력 2010-10-25 17:40
2006년 2월 이건희 당시 삼성그룹 회장이 8000억원가량의 재산을 조건 없이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공언했을 때 국민들의 반응은 비교적 냉담한 편이었다. 이 회장이 사회의 약자를 위해 스스로 재산을 내놓은 게 아니라 자신의 비리로 얼룩진 사회적 비판여론을 바꿔보려는 고육책에서 나온 비자발적 기부라는 이유에서 국민들의 시선은 그리 곱지 않았다. 당시 이 회장은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저가 발행과 이른바 국가안전기획부 도청 테이프 ‘X-파일’ 등에 휘말려 적지 않은 시련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2개월 뒤였다. 이번에는 국내 재벌 2위인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이 1조원 상당의 글로비스 보유주식을 출연해 사회공헌기금을 조성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때에도 국민들의 반응은 2개월 전이나 다름없었다. 정 회장이 비자금 조성 혐의로 검찰에 소환되면서 어쩔 수 없이 내놓은 자구책쯤으로 국민들은 여겼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양대 그룹을 이끌고 있는 재벌 총수들이 천문학적인 돈을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하는데도 박수는커녕 비아냥섞인 말을 듣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솔직히 마음이 짠했다. 워런 버핏이나 빌 게이츠는 기부로 칭송을 받는데 왜 우리나라 재벌 총수들은 핀잔을 들어야만 하는가 말이다. 그건 아마도 기부의 진정성 차이 때문이 아닌가 싶다.
지난 8월 마구 쏟아져 나온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문제도 마찬가지다. 사실 대기업들은 7월 말까지만 해도 중소기업의 상생문제에 대해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장관들이 대기업의 행태를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을 때에도 대기업들은 중소기업의 상생문제를 먼 나라 얘기처럼 했다. 이들은 상생을 강요하는 정부에 대해 시장경제를 해치는 행위라고 몰아세우기도 했다. 그러던 대기업이 9월 초로 예정된 대통령과의 간담회를 앞두고 상생방안을 마구 쏟아냈다. 일부 대기업 총수들은 중소기업을 방문한 현장사진을 언론에 보도자료로 내놓기도 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중소기업 상생에 가장 앞장서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기에 바빴다. 하지만 국민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두 손을 들고 환영해야 할 중소기업 당사자들조차도 ‘대기업들이 왜 저러지’ 하는 눈치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대기업들이 대통령과의 간담회를 앞두고 청와대 눈치를 보느라 저러는 것이지 중소기업을 진정으로 생각해서 내놓은 방안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래서 이들은 제대로 실천할 수 있을지도 미심쩍어했다. 아니나 다를까. 요즘에는 대기업들의 입에서 상생이라는 말조차 찾기 어려워졌다.
‘위대한 기업을 넘어 사랑받는 기업으로’라는 책을 공동 저술한 라젠드라 시소디어 교수(미국 벤틀리대)는 최근 국내에서 가진 조찬간담회에서 “사랑받는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남을 사랑하고 베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직원뿐 아니라 고객과 공급업체에 먼저 다가가되 단기간이 아니라 천천히 먼 여정을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통령과의 간담회를 앞두고 중소기업 상생방안을 만드느라 발버둥치는 모습을 보인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정말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 아닌가 싶다.
사후에 전 재산의 99%를 기부하겠다고 밝혀 세인들에게 감동을 준 홍콩 스타 배우 저우룬파(周潤發)는 “나의 재산은 내가 벌어들인 것일지라도 영원히 내 것은 아니기 때문에 세상을 떠날 때 아무 것도 가져갈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고 전해졌다. 들을수록 정말 가슴에 와 닿는 아름다운 말이라 생각된다.
우리나라에도 남을 위해 진정으로 기부하는 사람이 없지 않다. 영화배우 신영균씨는 500억원대의 재산을 영화인을 위해 내놓기로 했고 어렵게 모은 수십억원의 전 재산을 고향 마을에 기부한 할머니도 있다. 하지만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범이 돼야 할 대기업 총수들이나 사회지도층들만 유독 자발적 기부에 귀기울이지 않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머지않아 이들도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기로 하고 대기업이 진정으로 중소기업 살리기에 나섰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는 날을 기대해본다.
이용웅 산업부 선임기자 yw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