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태수의 영혼의약국(74)

입력 2010-10-25 15:10

가을, 원초적 주술을 거는 시간

예배당 느티나무가 아주 멋지게 늙어간다. ‘늙는다’고 하면 나이든 이들이 싫어할 테니, 그럼 ‘자란다’고 할까? 그러고 보면, ‘늙는다’는 것과 ‘자란다’는 말은 異音同義語로도 쓸 수 있겠다.

올 한 해도 잘 자란 느티나무가 어느새 천근으로 내려앉은 가을볕을 이기지 못해 땅바닥으로 나뒹군다. 그 위로 묵직한 가을바람도 올라타고, 아침 저녁으로 이슬까지 낙엽을 껴안았다. 한낮의 햇살이 너무 정겨워 손녀를 데리고 그네를 탔다. 열서너 번, 앞뒤로 흔들거리던 아이는 금세 내려 달란다.

맨땅을 구경하지 못한 아이는(아이가 사는 스위스 몽트렉은 맨살을 지닌 흙이 별로 없다. 어디든 잘 덮인 아스팔트와 돌멩이 천지다) 대지의 맨살에 철퍼덕 앉아 손으로 낙엽을 긁어모으고 있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까딱까닥하더니 나더러 자기 곁으로 오란다. 내가 ‘오, 나루!’ 하며 다가가 아이의 곁에 엉거주춤 앉자 아이는 아예 자기처럼 눌러 앉으라고 땅바닥을 툭툭 친다. 그 시늉이 어른스러워 멋쩍게 앉았다.

나도 아이를 따라 낙엽 모으기를 하는데, 아이는 아예 벌렁 낙엽위에 드러누웠다.

창세기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의 선악과를 따먹고 자신들의 하체를 나뭇잎으로 가렸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동안 이게 무슨 뜻인지 해석과 설명이 분분했었다. 그 중의 하나는 아담과 하와 이후로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옷을 지어 입는다는 통속적인 이해다.

그런데 요네하라 마리의 ‘펜티 인문학’이라는 책을 보니, 의복은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시작된 게 아니라 주술적인 목적으로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허리 부근에 끈을 두른 게 옷의 처음이었다고 한다. 아담과 하와가 나뭇잎으로 아랫도리를 가린 것은 악령과 사악한 기운의 침입을 막기 위한 주술적인 의식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가을은, 사악하고 나쁜 영들로부터 신성한 대지를 보호하려고 하나님이 ‘원초적인 주술’을 거는 시간이란 말인가?

“듣는 귀와 보는 눈은 다 여호와께서 지으신 것이니라”(잠 20:12)

<춘천 성암감리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