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인권침해·과실로 인한 손해배상 백태… 이륜차 안전모 과잉단속하다 숨지게 해 4400만원 배상

입력 2010-10-24 18:00


국가가 경찰의 수사·조사과정 과실 등으로 소송 1건당 수백만∼수천만원을 배상한 이유는 경찰관이 기본적 규정을 외면했기 때문이다. 나라에 예산상 손해를 끼친 경찰관들은 서류 처리에서부터 사건 수사에 이르기까지 경찰관 직무 규정에 적혀 있는 사항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경찰은 ‘업무처리 과정에서 일어난 실수’라고 항변했지만 법원에서 대부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공무집행 과정에서 경찰관이 저지른 실수는 고의성 여부를 떠나 일반 시민의 생명을 앗아갈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경찰이 어떻게 규정을 지키지 않았고, 이러한 행동이 시민에게 어떤 피해를 불러왔는지 백태를 살펴본다.

◇범죄경력 공개가 가정불화로=3년여 전, 귀가한 A씨는 아내에게서 싸늘한 눈총을 받았다. 아내는 “당신 이런 사람이었느냐”며 A씨에게 종이 한 장을 들이밀었다. 영문을 모르던 A씨는 아내가 내민 서류를 보고 깜짝 놀랐다.



자신의 전과 기록이 고스란히 적혀 있는 범죄경력 자료였다. 평생 숨기고 싶었던 2차례 성매매 전과까지 기록돼 있었다. 장모 귀에까지 이 사실이 들어갔다. A씨는 심한 가정 불화를 겪고 한동안 정신과 치료도 받았다.

한 경찰관의 부적절한 업무 처리로 말미암은 일이었다. 서울 모 경찰서 소속 B씨는 A씨의 범죄경력을 국무총리 행정심판위원회에 제출했다. A씨가 교통법규 위반과 경찰관 폭행 등으로 120일 운전면허 정지처분이 내려지자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행정심판을 청구한 뒤였다. B씨가 경찰 측 답변서를 행정심판위에 제출하면서 범죄경력 서류를 첨부한 것이었다.

행정심판위는 통상적 절차에 따라 이 답변서를 A씨 집으로 보냈고, 아내가 A씨보다 먼저 서류 봉투를 뜯어봤다.

A씨는 해당 경찰관이 위법한 직무 행위를 했으므로 1억원을 배상하라고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범죄경력 조회는 재판에 필요한 최소 범위 안에서만 할 수 있다”며 “국가는 A씨에게 5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한 경찰관의 신중하지 못한 일 처리가 쓸데없는 예산 지출로 이어졌다.

보이스피싱 의심 계좌번호를 신고한 새마을금고 직원 C씨의 이름과 연락처를 경찰관이 계좌 주인 D씨에게 알려줘 국가가 배상한 적도 있었다. 경찰관이 범죄 용의자로 불러 조사한 D씨의 혐의가 없다고 판단했더라도 인적사항을 알려주기 전에 C씨 동의를 받아야 했다는 게 법원의 설명이었다. 국가는 C씨에게 위자료 1000만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수사과정 인권 침해로 나랏돈 낭비=경찰이 직접적으로 인권을 침해해 국가가 피해자에게 배상한 사례도 여럿이다. E씨는 술집 주인과 술값 6000원 차이로 시비를 벌이다 경찰에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출동한 경찰관 3명은 협박을 당했다는 주인의 말만 듣고 E씨를 체포했다. E씨는 체포에 항의하면서 경찰관을 휴대전화 동영상으로 촬영했다. 그러자 경찰은 호송 과정에서 E씨에게 수갑을 채웠다. 경찰은 E씨를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입건했지만 무죄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E씨가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경찰이 술집 주인의 주장에만 의존해 속단했을 뿐 아니라 체포 시 필요한 절차를 제대로 준수하지 않고 명백한 죄증 없이 E씨를 현행범으로 체포했다”고 판결했다. 국가는 100만원을 배상해야 했다.

경찰이 압수수색영장 없이 범죄 용의자 동거인의 방에 들어가서 서랍 등을 뒤진 행위도 불법이라는 판결이 내려져 국가가 100만원을 내줬다.

◇과잉 단속이 사상자 초래=50대 목수인 F씨는 2007년 9월 아내를 뒷좌석에 태우고 소형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경찰의 물리적 제지로 오토바이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애초 F씨를 불러 세운 것은 지구대 소속 경찰관 두 사람이었다. 이들은 순찰차를 타고 가다 F씨와 그의 아내가 안전모를 쓰지 않은 것을 보고 멈추라고 했다.

F씨가 불응하고 운전을 계속하자 두 경찰관은 인근 외국공관 앞에서 경비를 서던 의경에게 “잡아라, 잡아라”고 소리쳤다. 의경은 F씨 앞길을 가로막은 뒤 양손으로 F씨의 팔을 잡아당겼다. F씨는 바닥에 머리를 부딪쳐 12일 뒤 숨졌다. F씨 부인과 자녀들은 사망 책임이 국가에 있다며 소송을 냈다.

법원은 “야간이 아닌 대낮에 49㏄짜리 소형 오토바이를 탄 채 시속 20∼30㎞의 속력으로, 그것도 뒷좌석에 중년 여인을 태운 상황이었으므로 중대한 범죄 혐의가 있었다고 판단하기 어렵다”며 “설령 그렇다고 해도 검거방법에 제한을 둘 수 없는 긴급한 상황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경찰이 공권력을 필요 이상 사용했다는 것이다. F씨 가족에게 약 4400만원이 지급됐다.

국가는 G씨에게도 1800여만원을 배상했다. 오토바이 날치기 사건 용의자를 검거하라는 지령을 받은 경찰관 두 사람이 순찰차로 불심검문하는 과정에서 G씨가 탄 오토바이를 들이받아 다치게 한 것. 두 경찰관은 반대 차로에서 오토바이가 오자 검문을 위해 중앙선을 넘었다. 갑자기 순찰차에 가로막힌 G씨가 깜짝 놀라 진행 방향을 바꾸는 과정에서 순찰차와 오토바이 접촉 사고가 일어났다. 날치기 사건 진범은 사고 30분쯤 뒤 다른 곳에서 붙잡혔다.

경찰은 G씨의 손해배상 청구에 대해 “가벼운 접촉 사고에 불과했고, G씨가 음주운전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술에 취했다는 것은 접촉 사고 이후 밝혀진 사실이며, 경찰관이 용의자 검거를 위해 순찰차가 오토바이를 들이받는 결과가 일어나도 좋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며 경찰 측 잘못이 더 크다고 판결했다.

◇경찰 믿다가 사망=경찰의 안전조치 미흡으로 2차 사고가 일어난 사례도 있다. H씨는 경찰의 주의 소홀로 아내를 잃었다. 2005년 4월 3일 밤 10시쯤 H씨는 승합차를 몰고 운전하다 정지신호를 보고 멈췄다. 갑자기 뒤차가 H씨 차를 들이받았고 그 충격으로 H씨 차도 앞차를 추돌했다. 사고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현장 조사를 마친 뒤 경찰서 동행을 위해 H씨 가족을 반대편 차로 갓길로 데려가려 했다. 2차 사고는 이때 일어났다. H씨 아내가 경찰관 뒤를 따라 무단 횡단을 하다 반대편에서 달려온 차에 친 것이다.

사고 현장에서 30m 떨어진 곳에 횡단보도가 있었음에도 경찰이 그냥 길을 건너게 해 일어난 사고였다. 재판부는 판결에서 “어두운 색의 옷을 입고 있던 H씨 아내에게 반사성 허리띠나 반사성 모자를 착용하게 하는 등 안전조치를 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이 사고로 정부는 H씨 가족에게 4500여만원을 지급했다.

공공의료 업무에 종사하는 의사 I씨는 변사자 처리 업무를 위해 경찰관이 운전하는 승합차에 동승했다가 경찰관 주의 소홀로 발생한 교통 사고에 목숨을 잃었다. I씨 가족은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정부는 약 11억원을 배상했다.

◇어이없는 과실로 배상=J씨는 사기 사건 피의자로 오인돼 경찰 조사까지 받았으나 동명이인임이 밝혀져 풀려났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J씨가 수년 뒤 자신의 기록을 봤더니 여전히 사기 사건 피의자로 지목돼 있었던 것. 담당 경찰관이 J씨는 피의자가 아니라고 기록을 고쳤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법원은 경찰이 오류를 정정해야 할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며 5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경찰이 민간인의 땅을 무단 점유했다가 배상한 적도 있었다. 경찰특공대가 훈련장으로 사용하는 서울 방배동 땅 일부를 경매로 낙찰받은 K씨는 지난해 국가를 상대로 낙찰 시점부터 소를 제기했을 때까지 임대료를 요구했다. 법원은 판결에서 경찰특공대가 부당이득금을 반환할 의무가 있다며 110여만원을 지급하라고 했다.

경찰이 납치범을 잡겠다며 만든 위조지폐 700만원을 범인에게 받고 오토바이를 판 L씨가 낸 소송에서도 국가 책임이 인정됐다.

법원은 “수사용 위조지폐가 유통될 가능성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으므로 이 때문에 피해가 발생했다면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 정부는 L씨에게 700만원을 줘야 한다”고 판결했다.

특별기획팀=김호경 권기석 우성규 김정현 기자 mainpor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