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형의 ‘문화재 속으로’] (39) 조선 중기 시대상 담긴 변수묘 출토품

입력 2010-10-24 17:23


조선시대 변수(1447∼1524)는 1469년 무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지낸 인물로 무신으로는 예외적으로 승정원(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는 비서기관)의 동부승지(정3품)를 제수받았습니다. 1494년 연산군이 즉위한 뒤 함경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했으나 자격이 부족하다는 탄핵을 받아 좌천되자 전임(轉任)을 요구하다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됐지요.

이후 1506년 중종반정 때 역군(役軍)을 모아 가담한 공로로 정국공신(靖國功臣) 2등에 책록되고 원천군(原川君)에 봉해질 정도로 신임을 얻었답니다. 1511년 정조사(正朝使·신년 축하를 위해 중국으로 보낸 수석사신)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그 뒤 충청도와 전라도의 수군절도사 등을 지냈으며, 1524년 7월 10일 향년 78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중종시절 도화서 화원이 그린 그의 영정은 1993년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18호로 지정됐답니다. 사후 400년 넘게 추앙받았던 그의 업적은 97년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창대리에 있던 원주변씨 원천군 선산의 묘소 이장(移葬)과 함께 다시 한번 조명받게 되는 계기가 됐습니다. 변수 부부의 합장묘에서 출토된 부장품 가운데 72점이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 또는 기탁됐거든요.

변수 부부의 묘는 내관과 외곽을 갖춘 이중관으로 관 바닥에는 북두칠성을 본떠서 7개의 구멍을 뚫은 칠성판(七星版)이 깔려 있었답니다. 관은 어깨 부분이 넓고 발쪽으로 가면서 좁아지는 당시 일반적인 형태이지만, 조선시대 관의 특징적인 접합 형식인 나비장이음(두 목재 사이에 나비 모양의 나무쪽을 끼워 잇는 것)의 초기 사례로 가치가 높다는군요.

출토품 중 상의와 주름 잡힌 치마를 따로 하되 허리 부분에 선장식이 있는 요선철릭(腰線帖裏·사진)은 조선시대 것으로는 처음 발견된 유물로 복식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랍니다. 또 목인형(木人形) 목마형(木馬形) 등 지금까지 사례를 찾아볼 수 없는 명기(明器)들은 인물의 표정과 자세, 손에 들고 있는 물건 등이 생생하고 세밀하게 표현돼 조형적으로도 매우 뛰어난 것으로 평가됩니다.

15세기 조선 초기의 미술사와 복식사, 생활사 등 문화사 전반을 아울러 역사적 실상 복원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이는 변수묘 출토품들은 2009년 12월 14일 중요민속자료 제264호로 일괄 지정됐습니다. 한 개인의 무덤 부장품으로 땅속에 묻힌 지 485년 만에 국가문화재로 거듭난 셈이죠. 이는 원주변씨 원천군 종친회의 기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겠지요.

국립민속박물관은 12월 6일까지 상설전시관 ‘한국인의 일생’관(제3관) 내 기증실에서 ‘변수묘 출토품, 영원한 동반’ 전을 개최합니다. 무관 출신으로 봉조하(奉朝賀·전직 관원을 예우하여 종2품의 관원이 퇴직한 뒤에 특별히 내린 벼슬)까지 누린 변수의 유물을 통해 조선 초기 관원들의 생활상을 살펴보는 것은 물론이고 인생역전이란 자신의 노력에 달려있다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문화과학부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