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리뷰-시라노 드 베르쥬락] 심금을 울리는 지고지순한 사랑
입력 2010-10-24 17:26
시라노(안석환 분)는 1대 100으로 싸워도 승리를 거둘 정도로 탁월한 검객이다. 게다가 문장 하나도 예술로 승화시키는 최고의 시인이자 음악가다. 모두 갖춘 그에게 단 하나 없는 것은 외모. 먼발치에서도 보고 알아차릴 수 있는 크고 못생긴 코 때문에 그는 작아진다.
언제나 위풍당당한 시라노는 이런 이유로 사랑하는 록산느(김선경 분) 앞에 당당하게 나서지 못한다. 시라노를 “오라버니”라고 부르는 록산느에게 그는 ‘좋은 오빠’일 뿐이다.
연적 크리스티앙이 나타났다. 시라노의 선택은 결투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의 글솜씨를 이용해 크리스티앙과 록산느의 사랑을 맺어주는 길을 택했다. 전쟁터에 가서도 매일 같이 록산느에게 편지를 썼다. 목숨을 걸고 적진을 넘어서 편지를 부쳤다. 편지에는 눈물자국도 남아있다. 눈물은 록산느를 향한 시라노의 마음이다. 글을 쓴 것도 시라노고, 그 안에 담긴 마음도 시라노의 것이지만, 이름은 크리스티앙으로 적었다. 그래도 시라노는 만족했다. 사랑하는 록산느에게 자신의 마음을 보여줄 수 있어서, 록산느가 그 사실을 모르더라도 행복했다.
편지를 통해 사랑을 키워가는 록산느와 크리스티앙. 크리스티앙은 록산느를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 시라노임을 알고 진실을 밝힐 것을 종용한다. 시라노가 용기를 내고 고백을 하려던 찰나, 크리스티앙이 포화 속에서 숨을 거둔다. 시라노는 진실을 마음에 묻는다. 록산느가 크리스티앙을 마음 속에 영원히 담아두도록. 그 후로 14년이 지났다. 록산느는 세상과 인연을 끊고 수녀원으로 들어갔고, 시라노는 매주 록산느를 찾아 위로를 한다. 록산느는 시라노가 숨을 거두기 직전에야 그 많은 편지와 사랑의 말을 해 준 주인공이 시라노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1897년 12월 파리의 포르트 생 마르탱 극장에서 초연된 연극 ‘시라노 드 베르쥬락’이 수백년 간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 건 지고지순한 사랑이 가진 영원성 때문이다. 자신을 위한 사랑이 아닌, 사랑하는 이의 행복을 먼저 생각하는 시라노의 마음은 심금을 울린다.
코미디로 시작해 비극적인 결말에 이를 때까지 극의 분위기에 따라 적절한 농도의 극을 풀어내는 배우들의 호연은 작품을 더욱 빛나게 한다. 11월 14일까지 명동예술극장(1644-2003).
김준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