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참 재미있는 놀이터였지…” 신현정 시인 유고집 ‘화창한 날’ 출간

입력 2010-10-22 17:37


기차에 토끼의 귀를 달아주고 무지개를 잡아 공작새를 만들던 신현정 시인(1948∼2009). 작고 1주기를 맞아 출간된 유고 시집 ‘화창한 날’(세계사)은 어릴 때 호주머니에 넣고 만지작거린 조약돌이 손바닥에서 눈을 뜬 것만 같다. 따는 이 세상에 놀러왔다가 그냥 가기 뭣해 몇 자 끼적거린 게 그의 유고 시편이다.

“집을 돌았다/분꽃을 따 입술에 물고 분꽃을 불면서 돌았다/분꽃 꽁무니가 달착지근했다/장닭을 불면서 돌았다/볏이 불볕 같은 장닭을 불면서 돌았다/나도 목을 길게 빼올리고는 꼬끼오도 해보면서 돌았다/개를 불면서 돌았다/(중략)/맨발로 돌았다/집아 사방을 뺑돌아 열려져라/집을 불면서 돌았다”(‘화창한 날’)

그가 살았던 세상은 놀이하는 공간이었다. 아니, 그는 세상을 놀이하는 공간으로 살다 갔다. 오욕칠정도 잊은 채. 그는 모자를 벗고 공손히 인사를 하기 위해 세상에 온 사람이었다.

“해태에게까지 와서는 한 발자국도 더는 나아가지 않은 듯했다/해태를 돌았을 것이다/어서 오십시오 안녕히 가십시오를 몇 십 번이고 중얼거리며 돌았을 것이다/(중략)/모자를 공손히 벗어놓고는/구두도 가지런히 벗어놓고는 쉬기는 쉬었을 것이다/앉은 자리에서 풀들을 주섬주섬 뽑았을 것이다/해태를 돌다가 연분홍 패랭이꽃 핀 것도 보았을 것이다/그는 어디로.”(‘그는 어디로’)

신현정은 마지막 연 ‘그는 어디로’에 그 자신을 두고 갔다. 숨바꼭질하듯. 그리하여 그의 시를 읽는 모든 이들이 술래가 되어 그를 찾아나설 수밖에 없다. 그는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 숨어 있는가. 그는 ‘머리카락 보일라 꽁꽁 숨어’ 나타나지 않을 따름이다. 그는 저 세상에 가서도 이 세상과 숨바꼭질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그가 남긴 시편들은 무슨 무슨 놀이 같다.

“양지쪽에서 살랑살랑 꼬리치는 강아지풀로 콧수염을 하고서/행여 떨어뜨릴 세라 아이는”(‘콧수염’)이 그렇고 “이 알들 깨어나면 이 애들 데리고/개나리 환히 꽃 핀 속으로 소풍 갈 날짜도 굴리어 보는 것이다”(‘포란(抱卵)’)가 그렇고 “고추잠자리 내 눈 앞에서 딱 멈춰 섰다/그래 누가 이기나 눈싸움 해보자 하는 것이것다”‘(눈싸움’)가 그렇다.

그는 놀이에 빠져버린 시인이었다. 놀이하는 인간(호모 루덴스)에게 이 지상의 모든 요일은 공휴일이 되고 만다. 놀이에는 아무런 목적성이 없다. 놀이에 몰두하는 순간, 어떤 댓가나 목적은 사라지고 그 자신이 놀이가 되고 만다. 그가 살았던 시대가 얼마나 절박하고 지긋지긋 했으면 그는 놀이나 하고 가자고 작정을 했던 것일까. 얼마나 외로웠으면 놀이라도 붙들어야 했던가에 생각이 미치면 그의 유고 시편들은 그가 남몰래 흘린 눈물 같기만 하다.

시집엔 그가 투병 중인 상황에서 써내려간 시 ‘해바라기’를 비롯해 총 48편의 시가 수록됐다. “해바라기, 길 가다가 서 있는 것 보면 나도 우뚝 서 보는 것이다/그리고 하루에도 몇 번이고 쓰고 벗고 하는 건방진 모자일망정/머리 위로 정중히 들어 올려서는/딱히 누구라고 할 것 없이 간단한 목례를 해보이고는/내 딴에는 우아하기 그지없는/원반 던지는 포즈를 취해보는 것이다/그럴까/해를 먹어버릴까/해를 먹고 불새를 활활 토해낼까/그래 이렇게 해야 한다는 거겠지/오늘도 해 돌아서 왔다”(‘해바라기’ 전문)

신현정 시인 추모 위원회가 지난 15일 서울 사간동 출판문화회관에서 마련한 1주기 추모 시제에서는 정진규 시인이 고인에 대한 회고를, 윤석산 조정권 문인수 김종해 상희구 이명수 시인 등이 고인이 남긴 시 낭송과 생전의 인연을 들려주었다. 부인 이정휘 시인이 유족 대표로 추모사를 낭독했다. 그를 먼저 떠나보낸 게 억울하다면 유고 시집을 펼쳐야 하리라.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