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변재운] 지하철의 참 좋은 할머니
입력 2010-10-21 17:45
며칠 전 대학생 딸이 지하철에서 보고 들려준 얘기. 객실 문이 열리고 할머니 한 분이 탔다. 빈 좌석이 없던 터라 앉아 있던 한 여고생이 할머니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할머니가 여학생을 눌러 앉히며 말했다. “힘들기로 하면 우리보다 학생들이 더 힘들지, 왜 일어나. 그냥 앉아 있어.” 그래도 학생이 한사코 일어나려 하자 할머니는 재차 눌러 앉히며 다시 말했다. “나는 지금까지 집에서 쉬다 나왔어. 하나도 안 힘들어.”
주변에 있던 승객들의 얼굴에 미소가 흐르더란다. 자기도 눈물이 핑 돌더라고 딸애는 전했다.
얼마 전 지하철에서 여중생과 할머니의 난투극이 있었던 터라 이 할머니의 따뜻한 마음이 더 정겹게 다가왔는지 모르겠다. 난투극 동영상을 보니 “이 할머니가 노약자 맞나”라는 생각이 든다. 사건의 단초를 여중생이 제공했다 해도 할머니의 폭력은 분명 지나쳐 보였다. 여중생 머리채를 잡고 뒤흔드는 모습은 너무 터프해서 ‘할머니 공포증’을 일으킬 만하다.
세태가 많이 바뀌었다고는 하나 우리나라는 아직 경로사상이 높은 편이다. 젊은이와 노인 간에 시비가 붙으면 젊은이가 지기 십상이다. 옛날부터 가장 오랫동안 변치 않고 쓰이는 말이 “요즘 젊은것들은 버릇이 없어”라는 것이라고 하지만, 노인에게 대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일단 마이너스 점수를 왕창 안아야 한다. 2008년 영화배우 최민수씨의 노인폭행 사건이 그랬다. 내막을 살펴보면 노인의 잘못이 큰데도 최씨는 경찰 수사 전에 이미 여론재판에서 패소 판결을 받았다.
노인에 대한 공경심은 높을수록 좋다. 젊은이도 언젠가는 노인이 되니 경로사상은 노후를 대비해 보험을 드는 것과 매한가지다. 하지만 노인들도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한다. 나이를 먹는 것은 서러움일지언정 자랑하거나 유세를 떨 일은 아닐 게다. 양보는 고맙게 받는 것이지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는 아니다.
지하철 노약자석을 놓고 벌어지는 자리다툼 관련 민원이 한 해에 수백 건에 달하는 모양이다. 젊은이들은 노인들이 노약자석을 ‘경로석’으로 착각하는 것 같다고 투덜댄다. 아직 배가 부르지 않은 임신부나 갑자기 몸에 탈이 난 사람도 노인들 눈치 때문에 앉을 엄두를 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평균수명이 늘면서 노인 인구가 급증하고 있다. 그만큼 젊은이와 노인의 유쾌한 공존이 절실해졌고, 이를 위한 고민도 필요해 보인다. 딸애가 전해준 풍경만 같았으면 참 좋으련만.
변재운 논설위원 jwb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