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정윤희] 책이 인생을 바꿀 수 있나
입력 2010-10-21 17:45
과연 책이 우리 인생을 구원할 수 있을까. 책에 대한 헌사와 찬사가 쏟아지는 시대에 책은 위험한 것이니 읽지 말라고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모두가 입을 모아 책을 읽어야 한다고 외친다. 그런가 하면 읽지도 않는 책을 쌓아두는 사람도 적지 않다.
독일의 문예비평가인 발터 벤야민도 책과 골동품 수집광이었다. 그의 서재를 방문한 사람들이 매번 던지는 질문은 “이 많은 책을 다 읽으셨습니까?”이다. 벤야민은 이렇게 답했다. “당신은 집에 둔 그릇과 찻잔을 모두 쓰시나요?”
최근 읽은 책 중에 ‘위험한 책’이라는 소설이 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카를로스 브라우어도 벤야민에 뒤지지 않는 책 수집가로 2만권이 넘는 책을 소유한 애서가이다. 또한 고서를 손에 넣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거실과 복도는 물론이고 자신의 침실마저 책에 점령당하고 욕조가 딸린 다락방에서 기거할 정도다. 김이 서려 책이 찢어질까 두려워 추운 겨울에도 찬물로 씻을 정도로 책에 대한 애정이 끔찍하다.
‘위험한 책’은 책을 둘러싼 사랑 이야기로 에밀리 디킨스의 시집을 읽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케임브리지 대학 스페인어학과의 여자 교수 블루마 레논의 죽음을 둘러싸고 이야기가 전개된다. 주인공은 교통사고로 죽은 블루마의 애인이다.
그는 사랑하는 연인이 죽은 후 책에 시멘트를 발라 집을 짓고 사는데, 이는 사랑하는 연인을 대신하는 책들과 헤어지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다. 책에 온전히 인생을 바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책이라는 몸속으로 자신이 들어감으로써 책과 하나가 되는 것이었다.
“그는 내게 아무 페이지나 펼쳐 각 단어의 간격으로 생겨난 수평이나 수직 방향의 길을 쫓아가 보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 과연 내 눈앞에 행과 행이 만들어내는 긴 통로들이 나타났다. 마치 단락들을 횡단하거나 때로는 끊어지다가, 끊어지면 대각선 방향으로 진로를 터서 종횡으로 또는 자유롭게 낙하하듯이.”
이 소설이 갖는 매력은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에 있다. 남녀의 사랑을 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보여준 것도 그러하지만 문자 간 공간과 행간들이 만들어내는 ‘통로’를 우리가 책에 집착하게 되는 이유로 설명한다. 소설을 쓴 카를로스 마리아 도밍게스는 작가이자 문학비평가이며 저널리스트로 ‘책이 인생을 바꿔놓는가’라는 화두를 던진다.
인간은 고독한 존재이다. ‘위험한 책’은 고독이 만들어내는 결핍, 집착, 광기, 자기파괴의 과정을 보여준다. 사람보다 책을 더 사랑한 남자, 그런 남자를 연민으로 바라본 여자.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인간의 본질을 파헤치는 주인공. 마술처럼 펼쳐지는 소설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명제를 흐릿하게 만든다. 존재는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그 무엇으로 또 존재한다.
책은 우리가 만든 욕망을 대신해 주는 대상에 불과하지 않을까. 가없는 욕망은 결국 죽음으로써 완성된다. 그러니 책은 위험할 수밖에.
정윤희 출판저널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