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배우로 떴다고요? 그래도 막일 하렵니다… 방글라데시 이주 노동자 칸의 출세기

입력 2010-10-21 18:03


방글라데시에서 온 칸 모하메드 아사드 자만(35)씨는 건설현장 노동자다. 일용직은 면했다. 동네 노래자랑에서 작은 건설회사 ‘사장님’과 안면을 튼 뒤 직원이 됐다. 그게 2007년이다. 현장을 돌 길 4년째. 요즘은 방 두 칸짜리 집 짓는 일을 한다. 지난 토요일에는 ‘가다 빼고 공구리 치는(나무틀을 만든 뒤 시멘트 반죽을 부어 바닥을 고르는 작업)’ 집터 닦기를 끝냈다. 눈썰미 좋고, 손이 잰 그는 회사에서 인정받는 일꾼이다.

19일 충북 음성군 삼성면 상곡리 주택 건설현장. 칸이 살고 있는 삼성면 덕정리의 이웃마을이다. 작업복 차림의 칸이 머리 위에 얹어둔 용접용 고글을 내려썼다. 오늘은 철파이프로 지붕용 트러스를 만드는 날. 손바닥만한 철판을 얹은 파이프 위에 용접기를 댔다. 사방으로 불꽃이 튀었다.

이날 칸의 마음은 유달리 바빴다. 내일, 서울의 한 극장에서 열리는 영화 시사회에 초청받았다. 오후 7시까지 상경하려면, 할 일이 많았다. 영화가 끝난 뒤에는 ‘관객과의 대화’가 예정돼 있었다. 그의 자리는 객석이 아니었다. 모두가 쳐다보는 무대. 칸은 그 위에 서기로 했다. 한국에 온 지 15년, 칸은 한국에서 영화배우가 됐다.

방글라데시에서 온 칸, 영화배우 되다

개봉 20일 만에 관객 80만명을 눈앞에 둔 8억원짜리 저예산 영화 ‘방가?방가!’. 한국 백수가 부탄 출신 노동자로 위장 취업해 겪는 이야기다. 의자 공장과 노래방을 오가는 저렴한 배경에, 스타 한 명 없는 그만큼 저렴한 캐스팅인데 영화는 연기와 이야기만으로 빛이 난다. 칸의 역할은 영화 속 외국인 노동자 4명 중 ‘알 반장’ 역. 모델과 영화학도 출신 외국 배우 틈바구니에서 정작 반짝인 건 진짜 ‘노동하는’ 배우 칸이었다.

“처음에는 제가 꼴찌였습니다. 감독님, 걱정 많이 했습니다. 저만 영화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어요. 저도 힘들었습니다. 감독님이 꼭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하는데, 저도 그렇게 하고 싶은데, 그렇게 못하고 있는 거잖아요. 그래도 시간이 가면서 촬영장에서 인기 폭발했어요. 그거 하나는 떳떳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는 감독님도 놀랐습니다. 감독님이 ‘칸이 이렇게 발전할 줄 몰랐다’고 했습니다.”

칸은 지난해 11월 육상효 감독이 직접 섭외했다. 감독이 주목한 건 그의 노래실력이다. 칸은 지난해 KBS 1TV 전국노래자랑 음성군편에서 외국인 최초로 최우수상을, 2008년 ‘아침마당’(KBS 1TV) 노래경연에서는 3주 연속 우승을 했다. 오디션을 본 날도 칸은 태진아의 ‘동반자’를 멋들어지게 뽑았다. 일주일 뒤 합격전화가 왔다. ‘내가 연기를 할 수 있을까?’ 고민이 없진 않았다. 영화 속 설정은 외국인 노래자랑. 딱 자신의 경험담이었다. 불법체류 노동자의 애환? 그것도 알 만큼은 알았다. “이미그레이션!” 영화 속 한마디에 아수라장을 만들며 뛰는 외국인 노동자들. 단속반에 쫓겨본 경험이라면 칸 역시 부족하지 않았다. 그래서 영화배우, 그거 한번 해보자 결심했다.

칸은 지난해 12월∼올 2월 서울과 충북을 오가며 영화를 찍었다. 처음에는 직장인 동우건설ENG에 두 달 장기휴가를 냈다. 모자라는 분량은 연달아 야근하고 주말에 찍었다. 그것만도 벅차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일은 개봉 후 시작됐다. 3주 만에 서울 대구 부산 등 전국 40여개 극장을 돌며 무대 인사를 했다. 지난 14일 서울 여의도동 국회가족극장 시사회에 참석했고, 20일 관객과의 대화를 가졌고, 신문 인터뷰도 했다.

바빠진 칸을 보며 동네사람들은 질문도, 걱정도 많았다. “영화 잘돼서 아예 그쪽으로(연예계로) 진출하는 거 아니야? 영화배우 됐으니 우리 삼성면에서 영영 떠나는 거 아니야? 정말 많은 사람 물어봅니다.”

걱정은 회사 대표도 했다. 칸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전혀 생각 없습니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동네 분들한테도, 사장님한테도. 영원히 삼성면 사람이다, 저는 그렇게 말합니다. 사장님도, 그러냐고 내가 오해했다고, 그랬습니다.”

사실 출연료 300만원에는 누구의 인생도 바뀌지 않는다. ‘방가?방가!’가 의외로 성공했지만 칸의 삶도 바뀐 게 없었다. 건설현장을 뛰며 칸이 버는 돈은 한 달에 120만∼150만원. 방글라데시 어머니에게 매달 40만∼50만원을 보내고, 한국의 장인 장모 용돈을 챙기고, 월세 30만원에 식비까지 떼고 나면 남는 건 없었다. 그가 ‘영화배우입네’ 헛바람 들어 돌아다닐 여유가 없는 이유다.

“영화 한 편 찍었으니까 영화배우다, 그런 생각 전혀 안 해요. 나 배우 됐다, 사람들한테 그런 소리도 절대 안 해요. 매일 일해야 하니까, 내 생활이 있으니까. 몸 움직이고 땀 흘려 일해야 해요. 공장에서 일하고, 공사장에서 일하고, 그렇게 살아야 해요. 그냥 사람들이, 칸 저 사람 일하면서 영화도 찍고 노래도 부르고 사람들에게 즐거움 주면서 열심히 사는구나, 그렇게 생각해주면 좋겠습니다. 열심히 일하면서 조금씩 영화도 찍고, 노래도 부르고 그렇게.”

칸의 두 번째 고향, 삼성면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에서 북쪽으로 40분 거리의 볼리야디. 칸이 8남매 중 일곱 번째 아이로 태어나고 자란 고향마을이다. 칸의 아버지는 동네 은행 지점장이었다. 한국으로 치면 중산층이지만, 8남매를 건사하기에 지점장 월급은 박봉이었다. 칸이 어렵게 방글라데시국립대학 법학과를 졸업한 뒤에도 살림은 피지 않았다.

1996년 한국에서 일하던 큰형이 칸을 불렀다. 첫 직장은 경기도 안산의 열처리 공장이었다. 거기서 5년, 자동차 휠 연마공으로 3년, 다시 삼성면 지하철 의자 공장에서 2년 넘게 일했다. 둘이 모은 돈으로 형은 고향에 집을 지었다. 그리고 이번엔 방글라데시로 칸을 불렀다. 그때 깨달았다. 스물한 살 나이에 떠나 이국에서 서른을 훌쩍 넘긴 그에게 고향은 한국이었다.

“가족들이 다 고향으로 돌아오라고 합니다. 어머니도 더 이상 (한국에) 있지 말고 내 앞에 있으라 합니다. 마음은 그러고 싶습니다. 재작년에 고향에 갔습니다. 3개월쯤 있다가 오려고 했는데 15일 만에 돌아왔습니다. 답답해서 (방글라데시에) 못 있겠습니다. 꿈을 꿔도 한국사람 꿈 꿉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무언가를 해야 하는데 그걸 못하는, 그런 꿈을 꿉니다. 그러니까 지금 제가 한국에 있는 건 돈 때문이 아닙니다.”

동우건설ENG 최정옥 대표도 그때 얘길 하며 혀를 찼다. “그때 고향 다녀오더니 (칸이) 살이 쪽 빠져 왔더라고. 작년에 영화 찍는다고 힘들게 돌아다닐 때는 볼에 살이 통통하니 올랐는데. 고향 갔다가 물갈이한다고 얼굴에 뭐가 막 나고. 음식도 여기가 더 맞고. 여기가 고향이 된 거라.”

2005년 한국여성과 결혼한 칸은 2008년 방글라데시 국적을 포기하고 한국인으로 귀화신청을 했다. 결과를 기다린 게 2년4개월째. ‘아이가 없다’는 이유로 승인은 계속 미뤄지고 있다. 칸은 “상관없다”고 했다. “귀화 심사를 떠나서 마음속으로 나는 한국 사람이다, 이미 100% 한국인이다, 그렇게 맘먹고 있어요. 이렇게 매일 대한민국 사람으로 살고 있잖아요.”

칸은 올 12월 개봉하는 영화 ‘심장이 뛴다’(김윤진 박해일 주연)에서 장기를 파는 이주노동자 역을 맡았다. 단역이지만 들어오는 배역은 짬이 나는 대로 그렇게 계속 해볼 생각이다. 영화 말고도 그를 찾는 곳은 많다. 주말에는 동네 노인복지회관에서 노래를 부른다. 무료한 노인들을 위한 무료 자원봉사. 임종도 지키지 못한 아버지와 고향에 계신 노모. 앞에 앉은 할머니, 할아버지를 보며 칸은 그들이 부모라고 생각했다. 인근 마을 축제에서도 칸은 단골 가수다.

“하루하루 이렇게 살면 돼요. 늘 이렇게. 오늘 하루 행복하게 살면 내일도 이 좋은 날 올 거고, 그러면 그날도 행복하게 살 겁니다. 저 영화배우도 아니고 가수도 아닙니다. 그래도 영화도 찍고 노래도 부를 겁니다.”

음성=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