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1960년대 문화대혁명 당시 입당원서 10번 넘게 퇴짜 맞아
입력 2010-10-20 21:25
“공산당 입당 원서를 10장 이상 냈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중국의 차기 대권을 예약한 시진핑(習近平) 국가부주석이 1960년대 후반 문화대혁명 당시 공산당 입당원서를 제출했지만 매번 퇴짜를 맞은 것으로 드러났다.
홍콩 명보(明報)는 20일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에 선출된 시 부주석이 2003년 직접 쓴 회고문에서 이 같은 사실을 공개했다며 회고문 전체를 신문에 실었다.
회고문은 푸젠(福建)성 대학 교우회 등이 ‘푸젠 박사의 풍채’란 제목으로 푸젠성 출신 박사 381명을 조명한 총서에 실려 있다. 시 부주석은 중국의 명문 칭화대(淸華大)에서 학부를 졸업한 뒤 박사학위까지 취득했다. 이후 푸젠성 당서기를 역임하는 등 공직의 상당 기간을 푸젠성에서 보냈다.
시 부주석은 회고문에서 “1969년 ‘지식청년’으로 분류돼 산시(陝西)성 옌안(延安)시 량자허(梁家河)촌으로 내려갔을 때를 전후해 10장 이상의 입당 신청서를 썼지만 집안 문제로 허가가 나지 않았다”고 적었다.
그는 국무원 부총리와 전국인민대표대회 부위원장을 지낸 시중쉰(習仲勛)의 장남으로 혁명 원로들의 자녀 그룹인 태자당(太子黨)으로 분류됐지만 이로 인해 젊은 시절 문화대혁명 때 어려움을 겪었다. 부친이 1960년대 초반 반당(反黨)분자로 몰리면서 모든 직위에서 물러나 사상개조를 받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시 부주석은 그를 눈여겨본 현 위원회 서기의 추천으로 부친에 대한 명확한 평가가 나오기 전인 1973년 공산당 입당을 허가받을 수 있었다. 시 부주석은 당시 농촌에서 보낸 7년간의 생활도 기록했다.
시 부주석은 “처음에는 의지할 사람이 없어 외로웠는데 생활에 적응해 가면서 내 숙소는 마을회관처럼 변해갔다”면서 “실사구시와 대중이 어떤 것인지 깨닫게 해주는 동시에 자신감을 키울 수 있게 한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글의 마지막엔 “(도시 청년의 농촌 강제이주 정책인) 하방(下放)의 경험은 실제 현실을 파악하고 자강불식(自强不息)하는 자세를 키워줬다”면서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용기도 가질 수 있게 했다”고 적었다.
서윤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