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추행 피해 소녀의 투신… 관대한 법원

입력 2010-10-21 00:33

성추행 피해자가 투신해 숨졌더라도 급박한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 아니었다면 가해자에게 사망에 대한 형사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판결이 나왔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6부(부장판사 배광국)는 성폭행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겁에 질린 피해자가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숨지게 한 혐의로 기소된 이모(15)군의 강간치사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고 20일 밝혔다.

재판부는 “CCTV 화면과 진술을 종합하면 이군이 피해자 A양(14)을 추행한 뒤 서둘러 현장을 떠났으므로 투신 당시 A양은 급박한 위해상태에서 벗어나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성경험이 없던 어린 소녀가 추행을 당한 극도의 수치심과 절망감을 이기지 못하고 투신자살한 결과일 가능성이 있는 점 등에 비춰보면 A양이 추행을 당한 직후 창문을 넘어 뛰어내린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군으로서는 A양이 추가 피해를 모면하기 위해 투신, 사망하리라고 예견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범행과 사망이라는 결과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더라도 결과를 예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가해자에게 강간치사죄를 적용할 수 없다는 판단이다. 재판부는 이군이 A양에게 “나 간다”라고 말하며 서둘러 현장을 떠났기 때문에 추가 범행을 우려해 투신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도 판결 근거로 제시했다.

재판부는 다만 공소사실 중 A양을 위협해 돈을 빼앗고 추행한 혐의(공갈 및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와 인근 식당에서 금품을 훔친 행위(특수절도)는 유죄로 인정해 징역 2년을 선고하고, 복역 1년6개월 이후에는 반성 태도 등을 감안해 조기 출소할 수 있도록 했다. 이군은 지난 5월 서울 관악구의 한 골목길에서 마주친 A양을 인근 아파트의 23층 계단으로 데려가 지갑을 빼앗은 뒤 1시간가량 성추행을 하다 떠났고, A양은 창문을 통해 뛰어내려 숨졌다.

1995년 대법원은 성폭행을 피하려고 객실 창문 밖으로 뛰어내린 여성이 숨진 사건에서 직접적인 성폭행 위협이 없는 순간이었더라도 성폭행 시도와 사망의 인과관계가 있다고 판단해 피고인에게 강간치사죄를 인정했다.

광주지법 형사2부도 지난 5월 가해자가 모텔에서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성폭행 위험을 느끼고 탈출하다 상해를 입었다면 강간치상죄가 성립한다는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안의근 기자 pr4p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