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겨운 문패엔 섬마을 삶 내음 오롯이 묻어나… ‘문화의 옷’ 갈아입은 통영 매물도
입력 2010-10-20 19:37
매물도가 아기자기한 ‘문화의 옷’을 입었다. 이곳에서는 여느 관광지와 달리 수려한 자연경관보다 주민들의 삶과 이야기가 주인공이다. 그래서 문패도 ‘김○○’가 아니라 ‘고기잡는 집’ ‘바다마당을 가진 집’ ‘꽃 짓는 할머니의 집’ ‘군불 때는 집’ ‘제주 해녀를 데려온 할머니’ 등이다.
통영에서 직선거리로 26㎞ 떨어진 매물도는 대매물도 소매물도 등대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매물도는 개선장군이 안장을 풀고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라고 하여 말 ‘마(馬)’자와 꼬리 ‘미(尾)’자를 써서 ‘마미도’로 불렸다. 그러나 경상도 발음 때문에 ‘매미도’를 거쳐 ‘매물도’로 굳어졌다.
매물도의 본 섬은 당금마을과 대항마을이 있는 대매물도. 그러나 소매물도에서 보는 등대섬이 아름다워 관광객들은 으레 매물도라면 소매물도를 연상한다. 덕분에 소매물도는 펜션이 들어서는 등 관광지로 변했으나 대매물도는 찾는 사람이 적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41세대 90여명이 사는 당금마을은 매물도에서 가장 낙후된 마을. 가파른 산비탈을 따라 머리를 맞댄 주황색 슬레이트 지붕 아래에는 평생 바다를 벗한 노인들이 가족처럼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바다에서 고기와 해산물을 잡고 양새밭으로 부르는 텃밭에서 채소를 얻는다.
당금마을의 전망 좋은 언덕에는 섬 주민들의 모교인 한산초등학교 매물도분교가 위치하고 있다. 지금은 공부할 아이가 없어 폐교로 변했지만 1963년부터 2005년까지 43년간 당금마을과 대항마을의 아이들을 길러냈다. 현재 이 학교는 매물도분교 동창생인 주민들의 문화공간으로 변신 중이다.
공을 차면 바다로 떨어질 것만 같은 학교 운동장의 동쪽 끝은 아찔한 절벽이다. 목재 데크를 따라 내려가면 파도가 들락거릴 때마다 천상의 화음을 연주하는 아담한 몽돌해변이 나온다. 규모는 작지만 물빛이 맑고 분위기가 아늑한 곳으로 해돋이의 명소.
대매물도에서는 모든 집들의 마당이 바다이다. 키 작은 집들은 좁은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어지럽게 들어섰지만 결코 이웃의 바다 조망권을 침해하지 않는다. ‘제주 해녀를 데려 온 할머니’ 문패가 붙은 집도 마찬가지. 노계춘 할머니는 과거 매물도에 해녀가 없던 시절 해마다 제주해녀들을 인솔해왔던 제주 출신으로 지금은 바다가 마당인 언덕에 정착했다.
소매물도와 달리 개발의 손때가 묻지 않은 대매물도의 당금마을은 물탱크와 골목 구석구석에 설치된 예술작품이 눈길을 끈다. 2007년 문화체육관광부의 ‘가고 싶은 섬’ 시범사업지로 선정되면서 문화예술 비영리법인인 ‘다움’과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공공미술 예술작품들로 당금마을의 생활과 문화를 표현한 것이다.
당금마을과 대항마을을 이어주는 1㎞ 남짓한 고갯길은 대항마을 아이들이 당금마을의 학교를 가기 위해 걷던 추억의 오솔길이다. 발아래로 ‘매물도판 오륙도’로 불리는 가익도 등 한려수도의 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동백나무 및 후박나무 군락이 울창한 고갯길은 곳곳이 해넘이의 명소.
대항마을은 26가구 45명이 살고 있는 섬마을로 매물도에서 가장 높은 장군봉(127m)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이 마을에도 주민들이 생활의 지혜로 디자인한 삶의 공간과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전설처럼 전해온다. 석양이 아름다운 대항마을의 꼬돌개는 200여년 전 매물도 초기 정착민들이 흉년과 괴질로 한꺼번에 ‘꼬돌아졌다’(고꾸라졌다의 방언)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매물도와 직선거리로 600m쯤 떨어진 소매물도는 아름다운 등대섬과 ‘모세의 기적’으로 연결된다. 소매물도 선착장에서 등대섬으로 가는 길은 마을 한가운데로 난 가파른 돌계단으로 이어진다. 이 길을 따라 20∼30분 정도 걸으면 폐교가 위치한 삼거리에 닿는다. 동백나무 군락에 둘러싸인 소매물도 분교는 1961년에 개교해 1996년에 문을 닫았다.
폐교 앞은 등대섬(1.4㎞)과 망태봉(0.1㎞)으로 가는 갈림길이다. 여행객들은 대부분 등대섬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서둘러 등대섬의 비경과 만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등대섬의 전경을 한눈에 보려면 소매물도 최고의 전망 포인트인 망태봉(152m)에 올라야 한다.
망태봉 정상엔 예전 세관의 감시초소로 쓰였던 콘크리트 건물이 마치 우주선 모양으로 서 있다. 주변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 생경한 모습이지만 이곳에서 바라보는 풍광은 일품이다. 감시초소에서 30m쯤 떨어진 바위에서는 소매물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푸른 바다를 캔버스 삼은 등대섬이 한 폭의 그림처럼 신비롭다.
망태봉을 내려와 폐교 앞 삼거리에서 목재 데크 산책로를 내려가면 소매물도와 등대섬을 연결하는 몽돌해변을 만난다. 약 70m 길이의 몽돌해변은 등대섬으로 걸어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로 열목개로도 불린다. 구절초와 해국이 만발한 등대섬과 소매물도는 하루 두 차례 썰물 때만 길이 열린다.
열목개에서 등대까지는 경사가 급하지만 10분 정도면 오를 수 있다. 등대가 서 있는 정상에서 내려다보이는 수직단애는 해금강을 연상시킨다. 등대 아래에 위치한 글씽이굴은 중국 진시황의 사신인 서불이 불로초를 구하러 가던 중 그 아름다움에 반해 ‘서불과차(徐市過此:서불이 이곳을 지나가다)’라는 글을 새겨놓았다는 동굴.
온갖 전설과 사연이 전해 오는 신비의 섬 매물도. 그리고 그 섬을 품고 있는 통영의 바다가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정지용 시인은 기행문 ‘남해오월점철’에서 통영의 바다와 섬을 문필로 묘사할 능력이 없다고 고백했을까.
통영=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