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김찬희] 뱅커의 신화, 그리고 추락

입력 2010-10-20 17:43


올해로 51년째다. 1959년 농업은행(현재 농협)에 입사해 뱅커(은행가)의 길로 들어선 때부터 치열하게 살았다.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중학교만 마치고 혈혈단신으로 상경했기에 더 그랬던 것 같다. 고졸이라는 학력에 가난한 시골 출신. 오로지 실력으로 승부할 수밖에 없었다. 입행 9년 만에 대구은행으로 스카우트됐다. 대구은행에서 비서실장까지 올랐다. 매사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고, 원칙을 지키는데 철두철미했던 덕이다.

나이 마흔이 되던 1977년 기회가 찾아왔다. 재일교포 기업인 이희건 신한금융지주 명예회장을 만난 것이다. 이 회장은 재일동포 자금을 모아 한국에 제일투자금융을 세웠고, 그는 이 회사의 이사로 입사했다. 1981년에는 은행설립 작업을 진두지휘했다. 이듬해 순수 민간자본을 바탕으로 하는 신한은행이 탄생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

그리고 승승장구했다. 10년 만인 1991년 은행장에 올랐다. 산업포장, 국민훈장을 받을 정도로 사회적 인정도 받았다. 외환위기라는 태풍은 되레 높이 날 수 있는 추진력이 됐다. 숱한 은행이 무너질 때 그가 버티고 선 신한은행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수익성, 건전성에서 국내 최고 수준을 자랑했다. LG카드, 조흥은행 등 굵직한 인수·합병(M&A)을 성공시키면서 자산 312조원에 이르는 오늘의 신한금융그룹을 일궈냈다. 그렇게 그는 ‘뱅커의 신화’가 됐다. 라응찬 신한금융지주 회장 얘기다.

하지만 ‘신화’의 마지막이 얼룩지고 있다. 라 회장이 금융실명제법을 어겨가며 차명계좌를 만들고 자금을 관리했는지, 신한금융지주 회장 자리에 네 번 연속 앉으면서 어떤 과욕을 부렸는지, 이 명예회장 자문료를 횡령했는지, 신상훈 신한금융지주 사장과 권력투쟁은 어떻게 시작했고 어디로 흘러가는지 등은 세간의 화젯거리가 됐다. 권력투쟁과 돈이 엮이면서 그야말로 ‘추문’으로 전락하고 있다.

이 때문일까. 라 회장은 “50년 동안 뱅커로서 올곧게 살아왔는데 마지막에 이런 일이 생겨 죄송하기 짝이 없다”고 했다. “착잡하다”고도 했다. 지난 11일 출근길에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였다. 그러나 라 회장이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 아니, 세월의 더께가 쌓이면서 잊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건 바로 은행의 공공성, 뱅커의 사회적 책임이다.

은행을 지칭하는 뱅크(Bank)라는 단어는 중세 지중해에서 태어났다. 다양한 종류·품질의 화폐를 교환해주는 환전상이 쓰던 환전대가 뱅크(Bank)였다. 은행은 현대로 넘어오면서 경제·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차츰 커졌다. 그와 함께 은행의 공공성도 자랐다. 자본주의 경제의 피라고 할 수 있는 화폐가 고루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핏줄 역할을 은행이 하기 때문이다.

은행의 공공성은 중앙은행이 펴는 통화신용정책의 통로역할을 한다는 점과 국가경제의 지급결제 시스템을 구성한다는 점에 뿌리를 두고 있다. 또 기업의 부도를 결정하고, 필요하면 자금을 공급해 기업회생 작업을 주도한다는 측면에서 공공성을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외환위기 당시 정부와 우리 국민은 막대한 세금을 들여가며 은행을 살렸다. 뱅커는 은행을 움직이고, 꾸려나가는 세포다. 뱅커가 타락하면 은행이 망가지고, 결국 경제가 병든다. 그래서 사회는 은행에 높은 건전성을, 뱅커에게 막중한 책임을 요구한다.

라 회장은 50년 동안 뱅커로 올곧게 살아왔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 사태에서 그가 보여준 모습은 뱅커라는 단어가 지닌 사회적 인식과 거리가 멀어 보인다. 혹여 자신이 일구고 키워온 기업에 대한 지나친 애착이 눈을 멀게 한 것은 아닐까. 라 회장은 은행장 시절 직원들과 가진 회식자리에서 “신한은행을 위해 몸을 불사르고, 떠날 때는 재로 남겠다”는 말을 했었다고 한다. 이 말처럼 건강한 은행, 책임 있는 뱅커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뜻 깊은 ‘한 줌의 재’가 되길 기대해본다. ‘신화’로 불렸던 그였기에 아름다운 퇴장을 기대한다.

김찬희 경제부 차장 c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