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 회고록] 충남 보령 고대도 하옥희 할머니

입력 2010-10-20 19:15


“저기 등성이 십자가느느 내가 칠순 권사취임식때 한거여”

교회 뒷 산 십자가

여어여기? 내가 칠순 때 한거여. 교회에서 목사님이 혀라 해서 했지. 조기 임종관 목사님 와서 있을 때 내가 권사 취임식 한다고 할 때. “거시기 이번이 권사 취임식이니 저기 등성에다가 십자가나 답시다!” 우스갯소리 비슷하게 하더라고. “내가 한 말 신용할거요? 할라면 합시다요.” 그렇게 해서 한 거여. 등대 불 좋았었는디. 전선줄이 여그서 자알 내려왔지. 그랬는디 지금은 오래 되니께 전선줄이 망가졌나벼.

나 가야혀

(내 집이) 요매헌 거. 아이고 다 추잡여. 어여 들어가. 나는 딱으야아지!

뭔 얘기? 시상에 뭔 얘기가 있어. 아휴. 모르겠다. 정신도 없어. 어저께 한 일도 다 잊어버리는 할매가 뭔 얘길 해. 에이구. 그까이꺼 얘기. 옛날 그 뭐 나 인생 신 얘길 다 하면 일구낭설<일구난설>이지. 어떻게 입으로다 다 한댜. 이렇게 배웠으면 책도 자 한 트럭이라고 했을 긴데. 말도 하기 싫고. 얘기 그 까이꺼 들어 뭣하려. 옛날 얘기 다 잊어부린 거. 시방 헐 얘기가 있나. 가만이 봉게 밭에도 못 가게 여 구찮으게 하려고 왔구만. 나 밭에 가야 혀 또.

고대도 유일한 교회

예수 믿는 사람이 믿을라골 해야지이? 섣달 열흘 삶은 호박 도래스마<도래송곳>도 안 들어가는 사람들이 아이고 징그러워 성가셔. 예수 믿으라면 예수 믿는다고 욕이나 하고. 뭐가 많여. 사람 없어어! 교회는 크고 좋은디 옛날엔 한 오십명쓱 됐지이. 그냥 다 이사가고 애들은 핵교 간다고 나가고. 또 믿는 사람들이 저 세상으로 떠나고 어쩌구 저쩌구 그러다 보니께 교회가 다 텅 비어버려 그냥. 말해 뭣혀. 목사님 사모님 아까워 죽갔어. 아까워 죽갔당께.

최초에 이 앞전 포에다가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귀츨라프가) 40일 정복했어. 40일 정복허고서 이따가 여 대고서 그렇기 전도하고 가셨다는데. 그때 그 책(성경)을 모싸 주고 간 것도 다 찢어나 없어 놔. 할배들이랑 밥에 말아 쳐 먹었나 없어. 그 냥반이 놓고 간 쪼각도 암껏도 없어. 교회랑 그만두고도 그런 사람 보면 욕허고 다 그랬잖아. 동네 망할러고 저런 거 들어왔다 그러고. 뻔허지.

나도 안 믿었어. 나도 예순 몇 살이여? 몇 살 먹어서 교회 나갔나 모르겠네. 예순 싯인가. 82년도. 예순 싯이여. 그때부텀 교회 댕긴다고 대녔어. 뭘 알고나 다녔감? 암것도 모르고 그냥. 친정은 뭣 동생들 이런 것들 다 믿는다고 혀야 다 그렇고. 그냥 뭐시한 거보담. 어드고오오<일종의 추임새> 노는 거 보담은 낫지.

이 없으면 잇몸으로

암껏도 못 먹어 매운 건. 숫제<아예> 입에서 젼디질 못혀. 응 이런 거만 요렇게 고추 안 넣고. 중간에 입이 비어놔갔고. 안 나서. 그러니께 나는 누구 오면 밥도 못해줘. 밥을 먹었당께 혼자 밥을 먹고 있네? 한 숟갈 사알짝 먹고 그리 지내. 이건 틀니. 틀닌디 원체 오래된 게 이가 다 닳아 갖구서 이가 짧아 빠져 갖구 깨물어지지도 안 혀. 아이구 인제 뭣허러 해여.

그것까진 뭣하러 알려고 그려어? 나가라 해서 나왔나. 아들 매느리가 나가라고 해서 나왔나? 그까이꺼 내가 나온다고 해서 나왔지. 누구 원망도 않고 탓도 않구. 우리 아들네 여서 살거든. 자짝<저쪽> 살다가 이리 내왔지.

여림에? 더우며는 저어어어어 선풍기 틀어놓고 겨울이는 장판 저거 따땃한거여. 지름 보일러 때고. 훈훈허고. 자구 싶으면 자구 놀고 싶으면 놀고 그르지 그 까이거. 뭐 시비허는 놈이 있나. 맘 편해.

영감은 그냥 아파하다 돌아가시데. 한 7∼8개월 누워서 앓으시더라고. 근디 그 의상<의사>집에다 뵌께 노병이니께 노환잉께 걱정하시덜 말라고 하더이 약을 한 재를 내서 지어다 드리라고 잡숫고. 그래도 안 나. 그냥 돌아가셨어. (예수) 믿으라고 허니까 그냥 소리소리 질러 쌌고. 맷번 댕기기는 했어 또. 그러다가 돌아갔어.



일구난설이여

고향은 요 근너<건너 원산도>. 나는 말을 허자면 아주 말 할 수도 없어어. 탄생한 제 더도 덜도 그만두고 석 달 디는 날 음력 정월 이십 이일 날 나를 탄생혀 놓고. 그 냥반은 원제 갔느냐면은 사월 이십 이일 날 잉게 꼭 석달 아주. 그렇게 아주 보금자리로 떠나고서 할머니들이라 나를 키운 거여. 스물 일곱이 돌아가셨응께. 청춘이, 시집도 안 갈 나이지 지금 사람 같으면. 그림자도 몰르지. 성<언니>은 벌써 돌아 가셨제.

아버지는 아이고 몰라. 배 버리고 옛날 여서 중선 배 그거 허고 그냥.

그때는 양 젖이 있나 우유가 있나 뭐가 있어. 보리 삶아서 이렇게 막 물 받쳐서 그 물 떠 맥이고. 그거 꼭대이가 있나 뭐가 있나 숟갈로 떠 맥이고 쌀 쪼끔썩 어떻게 깨쳐서 남의 젖 얻어 먹고. 어지건이 하니께는 사람 알아보고 인제 약으고 하니께는 누구만 보면 젖 먹을라고 막 울고 그랬댜 내가. 우리 당고모가 나 업고 우리 성은 뒤따라 대니고. 그러면 싯이가 다 운대. 애기 울고 고모 울고 우리 언니 울고. 그럼 밭 매던 사람들이 “아가 너들은 왜 이렇게 울어쌌니?” 그러면 “애기가 배고파서 울어싸서 그려유.” 그러면은 풀잎 싸 뜯어서 손 이렇게 흙 문태구서는<털어내고는> 젖 맥여서 준 디야. 그걸 먹으면 파글를를<파르르 떨며> 잔다 그랴. 그래서 조카딸하고 고모이는 쪼끔식 논디야. 깨면 또 업고.

언니가 맷 살 차인가. 한 예닐곱 살 차이 되지. 왜냐면 그 가운데로 하나 죽었디야 또. 그렇게서 내가 근근하게 커가지고서. 그때는 그냥그냥 밥은 안 굶고 살았어도 우리 친정은 다 외롭게 살 때지.

서모? 왜 아녀? 서모한테 이렇게 내가 혹독한 세상 살았지. 자기라<자기가> 난 애들은 다아아 공부시켜도 야학도 못 배게 했어. 그런디 그때는 지집애들 공부 개르쳤남. 근데 이 서모는 그 애들을 딸들을 천부<전부>다. 딸이 6형제여. 숙제하는디 앉도 못하게 혀 나는. 말도 말아 아주. 그렁게 나는 그 얘기를 다 하자면 일구난설이라고 하잖여. 그런 세상 산 사람이야 내가.

내가 머리가 어려서부텀 그렇게 좋았덩겨. 우리 아버지가 똑똑혔지. 애들 공부하는 데 가 앉아서 머리에다 집어 넣었거든. 싸가지가 이 애가. 근디 내 이름 자도 못 썼지. 못 썼는디 그냥 교회 다니면서 1,2,3,4를 몰러서. 1,2,3,4를 알아야 책 번호를 찾지. 밤이 앉아서 달력 놓구 “일 이 삼 사아” 이렇게 읽어나가 내가 혼자. 그렁게 말이지. 그러니께 머리가 좋았당께. 한 육십에. 그 전까진 몰렀지이. 갱싱이<간신히> 어쩌케 떠듬떠듬 성경책 한 줄씩 읽어보고.

영감은 ‘야끼다마’ 기관장

왜정 실 때 태어났응께 그때가 내가 맷 살 먹었나. 우리 딸이 시방 예순 싯잉께 그 아이 두 살 먹던 해. 육이오 날 때여.

저어어어 대천호라고 그 배 이름이 개랑호여. 난리가 나니께 삽지<삽지>도다 갖다 놨거든. 뻘개이<빨갱이>들이 그 배를 가질러 갔어. 갔는디 워떤 놈이 기계를(기계 설명서를) 일르나 못 읽으지. 기관장이 잔뜩 있지만 못 읽지. 우리 집 영감도 팔일오 해방 때 ‘야끼다마’<화력으로 움직이는 배> 기관장이여. 야끼다마 기관장이면 또 알아줬지. 마침 삽지를 간다고 갔는디 고대도서 기관장 뛰아난 사람 여기 삽지 왔다니께 찾아보라 하니께. 그 내 친구가 벽장에다 우리 영감을 감춰줬어.

동네에서는 닭 잡고 돼지 잡고 뻘갱이들 맥이느라고 막 술 퍼 맥이고. 이눔들이 정신 없어서 취했을 때 피란 온 순경이 냅다 참개머리<총 개머리판> 뺏어 갖구. 그렇게 해서 무네 모두 어청도 데려 갔어. 덕분에 여기 뻘갱이 구경도 못했지. 안맨도<안면도> 굴 파고서는 사람 전부다 굴 속에다 몰아넣고 불사지르려고 하는 날인데. 우리 집 영감은 우리 친구라 벽장에 감춰뒀다가 꺼내줘서 밤이 짐만 갖고 올라왔드라고.

서모 밑에서 자라 재취

시부모들이 그렇게에에에 잘하니까 거기다만 정신 쏙 빠져 갖구서는. 뭐가 좋은지 모르고 시아버지 시어머니 잘항게. 아휴 나도 말도 말어. 스무 살 먹어서 왔지, 이루 올 때는(재취로 시집). 아이그 징그러. 생각을 허믄. 그렁게 지금 가만 두면서 생각하믄. 교회가서 앉아서도 ‘아휴 아버지 내가 어떡허다 이렇게 됐담니까.’ 아. 그러고선 생각하믄 그러고서 내가 눈물을 흘려.

일찍 가셨지 시어머니 시아버지도. 한 십여 년. 십오 년인가 그렇게밖에 못 살았어. 한 해 그냥 다 돌아가시더라고. 아주 매느리라면 죽고 못 살었지. 그렁게 그 복. 거기다 홀려가지고서넨 아무 것도 모르고.

할아버지(남편)랑 금실 좋게 살을라도 살 수가 없었어. 맨나아아알 발전기 타고서 야끼다마 기관장잉께 사시사철 돌아댕기고. 그냥 어떨 땐 얼굴도 몰라. 워른<어른>들하고 애 넷은 키웠지. 그 마음이 내가 하나님 믿는 사람이 이러지 않느다는 거 알면서도. 아직 완전히 그것이 없어지들 않아. 그냥 가심이 항상 아파. 하아앙상.

목사님 생각에 눈물

매느리가 전도했어. 옛날 교회는 곽길보 목사님이라고 그 냥반이 참 고생 많이 혀고. 그때는 그걸 몰랐지. 어쩌그먼 돈이 얼마나 많길래 저걸 짓는다고 저러고 있나 그렇게 생각하고. 근디 가만히 생각하믄 지끔 생각하믄 그냥 고생 많이 했어. 근근하게 지어 놓구선 5년 딱 살구 가셨어. 이 동네 교회 없었지 그거 짓기 전에는.

똑똑했지. 점잖허고. 근데. 그 아들들 형제 그리고 딸 하난디. 그 아들들이 잘됐나봐. 한 3년 전인가 5년 전인가 여기 그 아들이 왔디랴. 왔는디 가걸랑 부우디 나 좀 찾아서 보고 오라고 아들보고 당부혀 쌌디랴. 눈물이 날 정도로 반갑더라고 시상에. 내가 갯밭에 가 가지고 요런 것 좀 해 가지고 보내준다 혔더니. 시방<금방> 가버렸어. 내가 울었당게 하도 서운해서.

예전에 내가 한번은 (서울에) 갔는데. 지하에 살데. 사모님도 목사님도 워디 가셨다고 그 애들만 있더라고. 어떻금 서운한가. 내가 생각하는 대로 갖구 가서는 끓여다 주고. 이렇게 못 보고 간다고 엄마 아빠 오면 전해달라고 하고 돌아서는데 눈물이 기냥. 밤 날<맨날> 어렵게 살았어유 아주우. 지금은 며느리 아들이 다 선상 노릇하고 아들 성제<형제>가 다 잘 됐디야. 지금은 아마 은퇴했을 기야. 근데 소식이 끊쳤어.

예수님?

예수님을 보야 만나지. 못 만나지. 뭐 마음이 안 나갈 때보다 한가롭고 그럴 때가 있고. 나 혼자만 교회 간다 했지 교회 간다하 며 좋탄 사람 하나도 없데. (남편이) 그리 매느리가 교회 댕긴다고 맨날 야단 쳤다구. 그냥 좋으나 말거나 갔지. 새벽기도는 목사님이 시간 정해주는 대로 나갔지. 뭐 어떤 기도를 한디. 그냥 뭐 나랏님 놓고 기도허고 전쟁도 일어나지 말고, 싸우지도 말고, 편한 나라 되 달라고 기도하고. 동네 사람들 다 교회 나와 같이 편케 살자고 기도혔지. 전도해야 그것들 머 생전 말을 듣는 것들인가. 교회 나가라고 하면 밥 주느냐 옷 주느냐 어쩌냐 허면서. 말을 못혀.

목사님은 이렇게 앉았을 때는 얘기허고 숭허물<흉허물> 없고 해도 강대상에 올라가서 말씀 증거하시면 그냥 두려웁고 그려. 겁나게 아주 어려웁고. 무슨 말 한마디 한마디 하시는 말씀이 꼭꼭 그냥 다. 근데 참 아휴 고맙고오. 항상 그저 하나님 아버지 고맙습니다아 고맙습니다 우리 목사님 사모님 어서 이런 양반들 골라서 방방곡곡에 갈 데도 이렇게 많을 건데 어뜩해 이렇게 보내주셨냐고 고맙다고 그냥 기도를.

소원

(성경을) 쪼끔쓱 읽지. 떠듬떠듬 읽다가. 좀 직감이 가. 인자 좀. 천국도 있고 지옥도 있고 그런다 하데. 내가 가봤시야 알지.

나는 허리는 그때 그냥 그렇게 다치고 나더니 빙신 됐잖아. 팔십 넘어서 갯벌 내려가는데 이끼 거게 미끄러져 허리가 등 빼가 요렇게 어긋났어. 요걸 맞추는디 아따 되게 정신 그때 나가드라. 근데도 안 죽데. 와드득 하데 그냥.

그려도 그짓말인가 참말인가. 저기 건사님은 나더러 “저 올라올라 발귀 딛고 앉았네.” 바늘귀를 나보고 그거 깬다고. 바늘귀도 못 꿰는 거 그거를 머시 눈이라고 달고 있어? 안 그려?

아이고 무슨 돈이여 그 까이께. 여기 저 거시기 때 늙었어도 그때 쪼끔 돈 벌었지 벌기는. 지름 파동<태안 기름 유출 사태> 났을 때여. 근디 서태안은 어떻게 돼았는지. 벼가 갯물가루<태풍 곤파스> 끼얹어서 다 죽었다던디. 이기 싹 다 새로 난 거여. 저 은행 잎 새로 난 거 봐아.

소원이 뭐여 아프지 말고 편안허게 잘 살고, 동네 마을 주민들이나 다 편코, 이렇게 교회 좀 다 나오는 거 그거지. 다른 건 뭐.

나는 인자 가봐야 쓰겄구만. 더덕은 다 캤는디. 내년 봄이 워디서 나오냐며는 앞이 거시기 개나리 나무 있는 디 거께서 몇 개 나올규. 비류<비료>나 좀 끼앉고 갈까?

연보

1920년 1월 충남 보령 원산도에서 2녀 중 차녀로 출생. 모친은 3개월 뒤 사망

1940년 스무 살에 고대도의 스물여섯 살(추정)된 박채옥씨와 혼인. 전처가 사망한 박씨의 재취로 들어감. 전처와 박씨 사이에 1남1녀

1943년 장남 석구 출생

1948년 차남 석순

1951년 장녀 석금

1954년 차녀 석희

1960년 삼남 석봉

1982년 고대도교회 설립

1990년 권사 취임, 남편 사망

고대도교회는

고대도교회는 한국 최초의 선교지 고대도에 설립된 교회다. 한국을 방문한 선교사 귀츨라프(독일 태생 의사)는 1832년 여름 20여일간 고대도에 머물면서 근대 문명과 기독교를 전했다. 예수회 신부 세스베데스가 임진왜란 당시(1594년 봄)에 두 달간 한국에서 18만 군인을 선교한 기록이 있지만 개신교 선교사로는 귀츨라프가 처음이다. 그로부터 150년이 지나서야 이곳에 교회가 설립됐다. 장로교 합동 측 개혁파인 곽길보 목사가 1982년 낙도선교회 주선으로 고대도교회를 세운 것. 2006년부터 박원열 목사가 열 번째 담임목사로 교회를 맡고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신 총회는 2001년 고대도교회를 귀츨라프 기념교회로 선포했고 4억여원의 헌금을 모아 2005년 선교기념관을 건립했다. 현재 고대도교회 출석 교인은 14명. 충남 보령시 오천면 삽시도리 1022번지 1(041-932-2753).

고대도(보령)= 정리 이경선 기자·사진 윤여홍 선임기자 boky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