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신학강좌] 영성의 길
입력 2010-10-19 17:29
침묵의 기도
기도는 침묵의 언어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입을 열 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입을 닫을 때 말씀하신다. 침묵은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세계의 질서다. 추운 겨울은 가끔 우리에게 쓸모없는 계절처럼 보인다. 동물은 동면하고 식물은 긴 휴식에 들어간다.
그러나 새 봄은 긴 겨울이 지나야 온다. 매서운 추위가 지나간 산에 진달래가 피고 골짜기의 버들가지도 눈이 녹아야 핀다. 겨울의 긴 침묵이 봄의 교향악을 낳는 것이다. 기도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침묵 가운데 말씀하신다.
엘리야가 동굴에서 세미한 음성을 들었고(왕상 19:12), 세례 요한도 빈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눅 3:2). 말은 기도의 본질이 아니다. 말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하는 최소한의 매개일 뿐 기도의 전부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소리, 곧 침묵의 소리(sound of silence)를 들으신다. 나의 유창한 말이 하나님을 감동시키지 않는다. 나의 긴 말이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통회하고 상한 심령이 하나님을 감동시킨다(시 51:17). 또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
한 수도원에 젊은이 하나가 기도를 배우러 왔다. 노인이 물었다. “자네는 어떻게 기도하나?” 젊은이가 자기의 기도를 길게 설명했다. 얼마나 길고 장황한지 도무지 들을 수가 없었다. 노인은 조용히 차를 따르기 시작했다. 쉬지 않고 차를 따르다가 차가 잔에 넘치기 시작했다. 젊은이가 소리쳤다. “차가 넘칩니다. 그만 따르세요.” 그때 노인이 말했다. “이것이 자네의 기도라네. 자네 기도는 자네로 가득 차서 하나님이 들어갈 자리가 없네. 자기를 비우게.” 자기를 비워 하나님으로 채우는 것이 침묵기도이다.
우리는 하나님으로 채우기 위해 자주 자신을 비워야 한다. 특히 목회자가 그렇다. ‘목사는 목숨 걸고 말하며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렇다. 목회자는 목숨 걸고 할 말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목숨 걸고 할 말은 대개 깊은 침묵을 통해서 나온다. 침묵의 고뇌를 거치지 않은 습관적 언어 때문에 목회자는 항상 힘들다. 엘톤 트루브러드가 신약에 나타난 예수님의 언어를 연구했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은 네 가지 형태로 말씀했다고 한다. 먼저 낮은 톤으로 말했다. 예수님은 소리 지르지 않았다. 소리 지르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을 꾸며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고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사 42:2) 두 번째는 눈으로 말했다.
예수님은 입으로보다 눈으로 더 말씀하셨다. 입으로 말할 때 사람들은 귀로 듣지만 눈으로 말할 때 사람들은 마음으로 듣는다. 세 번째 예수님은 짧은 말을 사용했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은 거의 단문이다. “서로 사랑하라.”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내 양을 먹이라.” 사람들은 짧게 말할 때 깊게 듣는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눈물로 말씀하셨다. 최고의 언어는 눈물의 언어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 11:35) 나사로 앞에 선 슬픔을 이처럼 감동적으로 그린 말씀은 없다. 예수님의 기도는 또한 침묵의 기도다. 본회퍼의 말대로 침묵은 말 없음이 아니다. 말의 넘침이며 말의 도취요 말의 제사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입을 닫고 귀를 열 때 말씀하신다.
이윤재 목사(한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