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박강섭] 고사리 할머니의 눈물

입력 2010-10-18 17:44


얼마 전 슬로시티로 유명한 전남 신안군 증도에서 ‘고사리 할머니의 눈물’이 뒤늦게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고사리 철을 맞아 마을 뒷산을 오른 할머니는 하루 종일 두 포대의 고사리를 채취했다. 고사리 한 포대를 메고 힘겹게 산을 내려온 할머니는 도로 한쪽에 포대를 놓아두고 다시 산을 올랐다. 나머지 한 포대를 메고 하산한 할머니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사이에 고사리 한 포대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할머니는 대성통곡을 했지만 사라진 고사리를 되찾을 방법은 없었다.

지난 봄에 지도와 증도를 연결하는 증도대교가 개통되자 2000명에 이르는 증도 주민들은 한껏 기대에 부풀었다. 철부선이 끊기는 밤에 응급환자라도 생기면 구조헬기를 불러야 하는 섬의 열악한 현실을 감안할 때 증도대교는 주민들의 생명선이나 다름없다. 관광객이 몰려들면 소득도 늘어날 것이라는 당국의 분홍빛 청사진에 주민들은 증도대교가 개통될 날을 손꼽아 기다려왔다.

하지만 주민들의 기대는 증도대교가 개통되던 날부터 산산이 부서졌다. 주민 수보다 많은 수만명의 관광객이 한꺼번에 몰려들자 섬은 도시처럼 북적거렸다. ‘금연섬’을 만들겠다고 주민 스스로 담배가게 문을 닫았지만 우전해수욕장 주변은 온통 담배꽁초였다.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는 주민들의 소득도 관광객 증가와 별 연관성이 없었다.

뿐만 아니었다. 관광객이 쇄도하면서 평화롭던 섬마을은 치안 문제까지 발생했다. 할머니의 고사리 포대가 없어진 것도 승용차를 타고 마음대로 섬을 드나들 수 있게 됨으로써 생긴 부작용이었다. 섬 주민들은 뒤늦게 증도대교를 원망했지만 다리를 철거할 수는 없는 일. 증도는 접근성이 좋아진 대신 슬로시티의 정체성을 잃기 시작했다.

증도보다 작은 섬인 경남 통영의 매물도에서는 지난 13일 작지만 의미 있는 마을잔치가 열렸다. 주민들의 문화공간으로 변신한 당금마을 폐교 운동장에서는 농악대의 흥겨운 가락에 맞춰 할머니들이 덩실덩실 춤을 추고 운동장 한쪽에는 주민들이 정성껏 마련한 슬로푸드 음식상이 차려졌다.

‘2010 매물도 마을잔치’로 명명된 이번 행사는 2007년 문화체육관광부에 의해 매물도가 ‘가고 싶은 섬’ 시범사업 대상지로 선정된 이래 그동안의 성과를 돌아보고 주민들의 화합과 발전을 기원하는 축제의 자리였다. 매물도는 통영에서 연락선으로 1시간40분 거리에 위치한 낙도로 증도처럼 다리를 놓을 수도 없다. 섬 발전 방향을 놓고 고민하던 주민들은 섬에 ‘문화의 옷’을 입히자는 전문가들의 제안으로 제주도와 일본의 성공한 지자체에 단체로 답사를 다녀왔다. 그리고 조촐하지만 자신들의 공동체에 자부심을 갖고 섬의 생활과 문화, 그리고 환경을 보존하자는 전문가들의 제안을 흔쾌히 수용했다.

4년간의 준비작업 끝에 물질하는 해녀 할머니와 생명수인 물탱크가 매물도의 살아 있는 역사로 등장하고 골목길은 공공미술 거리로 탈바꿈했다. 할머니의 꽃밭과 텃밭, 우렁이 사는 도랑, 군불 때는 옛 부엌, 장독대, 돌담 등 주민들의 손때 묻은 모든 것이 스토리텔링 작업을 거쳐 문화와 관광의 콘텐츠로 거듭났다. 불편하기 짝이 없지만 게딱지 같은 민박집도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섬 주민들의 소소한 일상에 관심을 가진 도시인들이 늘면서 매물도가 새로운 섬 관광 모델로 떠오른 것이다.

우리나라는 3000여개의 섬을 자랑하는 해양국가다. 21세기 신해양시대를 맞아 서해안과 남해안의 섬을 세계적 해양 관광지로 조성하겠다는 정부와 지자체의 청사진에 따라 섬과 섬, 섬과 육지를 잇는 연도교와 연륙교가 속속 완공되고 있다. 하지만 주민들의 삶의 질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외지 자본의 진출로 상실감은 더 커지고 환경만 파괴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섬은 육지와 다리로 연결되는 순간 더 이상 섬이 아니다. 증도 고사리 할머니의 눈물과 매물도 해녀 할머니의 춤이 이를 증명한다면 너무 지나친 비약일까.

박강섭관광전문기자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