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하는 세상에서 희망찾기… 정유정 세계문학상 수상작 ‘내 심장을 쏴라’ 무대에

입력 2010-10-17 17:31


스물다섯 살 동갑인 수명(김영민)과 승민(류승주)은 정신병 환자들이 있는 수리희망병원 501호에서 만난다. 정신분열과 공황장애를 6년간 겪은 수명은 집에 돌아가자마자 다시 병원으로 보내졌다. 아버지는 집에만 처박혀 있는 수명을 보며 “하는 게 뭐냐. 쓸 데 없는 놈”이라며 타박한다.

수명이 병원으로 이송되는 차안, 갑자기 두 대의 차가 나타나 추격전을 벌인다. 추격전 끝에 한 남자가 끌려간다. 승민이다. 그는 가족 간의 유산 분쟁에 휘말려 억지로 병원으로 보내졌다. 승민은 특별한 정신병이 없다.

연극 ‘내 심장을 쏴라’는 답답한 현실에 갇힌 청년들을 정신병원에 감금된 이들에 비유해 불안한 젊음의 정체성과 희망을 이야기한다. 멀쩡한 사람과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은 사람이 모두 정신병원에 갇혀 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억압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의미한다. 2009년 세계문학상 수상작인 정유정 작가의 동명 소설을 무대로 옮겼다.

남산예술센터의 원형무대는 정신병원이라는 폐쇄된 공간을 표현하는 데 효율적인 장치가 된다. 객석에 둘러싸인 배우들은 별다른 무대 장치 없이 고립된 공간에 머물게 된다. 암전 상태에서 음산한 느낌마저 주며 들리는 노래 ‘오버 더 레인보우’는 ‘어딘가 저 너머에 무지개가 있을 것’이라는 희망적인 노랫말과는 달리 절망을 진하게 나타낸다.

“갈 데 없어. 몰라서 그래? 여기가 끝이야.” 조울증 환자인 김용은 수명과 승민에게 희망을 품는 게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병원 간호사와 보호사들은 이들이 낫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희망을 가질 수 없도록 억압할 뿐이다.

어머니의 자살을 자책하는 수명은 현실을 대면하려 하지 않는다. 계속 피해 다니며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살려고 한다. “싸우기도, 미워하기도, 남의 일에 끼기도 싫어. 조용히 살고 싶어.”

반면 강제로 갇힌 승민은 계속 꿈을 좇는다. 전직 패러글라이딩 선수인 승민은 병원을 탈출해 다시 한 번 날아오르려 한다. 망막색소변성증으로 시력을 점차 잃어감에도 그의 꿈은 점차 강렬해진다. “글라이더를 탈 때 찬바람이 몰려와. 내가 살아 있다는 걸 느끼고, 자유가 뭔지 가슴으로 느낄 수 있어.” 승민은 결국 병원을 탈출해 마지막 비행을 해낸다.

승민에게서 힘을 얻은 수명은 끝내 세상과 맞닥뜨릴 결심을 한다. 트라우마를 상징하던 긴 머리도 싹둑 자른다. 간절하게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외치며 세상과 조우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두려움 투성이다. 하지만 그는 세상을 향해 소리친다. “내 심장을 쏴라. 안 그러면 난 절대 안 죽어.”

‘인류 최초의 키스’, ‘루시드 드림’ 등에서 인간의 심리를 밀도 있게 그려내는 능력을 보여준 김광보 연출은 이번 작품에서도 관객으로 하여금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할 수 있도록 극을 끌어 나가는 솜씨를 발휘한다. ‘웃어라 무덤아’, ‘발자국 안에서’ 등에서 호흡을 맞춘 고연옥 작가가 대본을 썼다.

하지만 극에서 표현된 강제적인 정신병원의 모습은 정신병원에 대한 편견을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충분한 설명이 필요할 듯 하다. 24일까지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02-758-2150).

김준엽 기자 snoop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