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애옥] K선배님께

입력 2010-10-17 17:49


K선배님, 제 연구실 창밖을 봅니다. 산속이라 가을이 깊어가고 있음을 만끽할 수 있어 감사한 마음에 울컥하였답니다. 처음엔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 맨 꼭대기 구석이라고 불만도 있었는데 이제는 제 연구실을 펜트하우스라 부릅니다. 붉은 단풍잎이 참 곱네요. 단풍은 자기 자신을 올인한 결과라고 하는데 우리는 무엇을 위해 올인해 왔을까요?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한다고 이렇게 허둥대면서 살아야 하는지, 그러면서도 삶의 굴레에 빠져 생각 없이 살아온 타성을 고백합니다. 요즘 주위에서 ‘건강에 신경 써라’는 말을 부쩍 많이 해주네요. 나이가 나이인지라 그런가 봐요.

누구보다 열심히 치열하게 살아온 선배이신 것을 잘 압니다. 건강과 일을 한꺼번에 잃은 충격과 상처에 도움을 드리지 못하고 기도만 하고 있는 후배이지만 다시 건강을 회복하셔서 좋아하는 일 하실 것을 믿습니다. 절망해 있는 선배에게 제가, 신호를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자고 한 말이 혹 서운 하셨나요? 선배, 몸에 나타난 이상 덕분에 지금 치료받으며 건강의 중요성을 경험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언젠가는 암 덩어리가 나를 좀 필요로 해서 잠시 머물다 갔다고 담담하게 미소 지으며 말씀하실 날이 올 겁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 해버리세요.

며칠 전 친구와 번개하게 되었어요. 예정하지 않은 갑작스런 만남 말이에요. 우리 인생도 번개처럼 병을 만나기도 하고 행운을 만나기도 하고 멋진 사람을 만나기도 하지요.

친구가 말한 찻집에 가보니 나이가 지긋하신 도예가 한 분이 동석해 계셨어요. 그분의 이야기를 듣는데 참 재미있고, 성품이 얼마나 맑고 깨끗하신지 삶에 찌든 제 마음이 드라이클리닝 된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깊은 산속에서 도자기 굽는 가마 하나 가지고 자족하며 사시는 분이시라네요. 그 흔한 손전화도 없으시더군요. 옛 말씀 중에 욕심 덜 부리고 물 흐르듯이 사는 것이 인생의 선 가운데 최고의 선이라는 말(上善如水)이 생각났어요. 이렇게 좋은 기운을 주는 사람을 만나고 나면 저까지 정화되는 느낌이에요. 그래서 삶은 만남에 있다고 하였을까요?

선배님, 언젠가 바쁘지 않으면 괜히 불안하다고 하셨죠. 그래서 운전하는 시간도 아깝다며 택시만 타셨잖아요? 죄송한 말씀이지만 경쟁에 쫓기고 있는 현대인의 특징을 선배가 보여주셨어요. 선배는 그동안 자신의 일과 가족을 위해서 앞만 보고 살아왔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 몸의 주인으로 몸의 이야기도 들어가면서 살게 됨을 감사하기로 해요. 넘어졌을 때 일어날 수 있는 방법은 내가 넘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이라고 제 선생님께 배웠습니다. 이제 넘어졌음을 아셨으니 넘어진 그곳에서 다시 일어나면 됩니다. 다른 곳에서 일어나려 무리하지 말고 지금 넘어진 지점에서 우리 다시 시작해봅시다.

이번 독감예방주사는 신종플루도 잡아준다니 꼭 맞으라는 당부 말씀, 실천할게요.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김애옥 동아방송예술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