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형의 ‘문화재 속으로’] (38) 100년 만에 귀환한 북관대첩비

입력 2010-10-17 17:29

임진왜란때 의병 결기 담아 민간 차원 첫 반환운동 결실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2년, 함경도 북쪽 지역(북관)에서 의병이 궐기했습니다. 의병들은 당시 가토 기요마사가 거느린 왜군을 무찌르고, 함경도로 피란한 두 왕자를 왜적에게 넘긴 반란군을 붙잡아 처형하는 등 혁혁한 공을 세웠답니다. 이후 숙종 때(1709) 함경도 북평사(北評事·병마절도사의 보좌관)로 부임한 최창대(1669∼1720)가 길주에 이를 기리는 비석을 세웠습니다.

높이 1m87㎝, 너비 66㎝, 두께 13㎝에 달하는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 1500자 비문에는 북관 의병들의 승리 기록이 소상히 담겨 있지요. “고단하고 미약한 데서 일어나 도망하여 숨은 무리들을 분발시켜 충의로써 서로 격려하고 마침내 오합지졸로서 완전한 승첩을 거두어 한 쪽을 수복한 이로는 관북의 군사가 제일이다”라는 문구에서 보듯 의병들의 결기가 느껴집니다.

200년 가까이 북관의 자랑스런 승전비로 늠름하게 서 있던 대첩비는 1905년 러일전쟁 때 함경지방으로 진출한 일본군 제2예비사단 여단장 이케다 마시스케 소장에 의해 비운을 맞이하게 됩니다. 일본군의 패전기록이 담긴 것을 본 이케다 소장은 비석을 파낸 다음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도쿄 야스쿠니신사로 옮겨 방치하고 말았던 것이죠.

그런 후 북관대첩비의 잃어버린 세월은 100년 정도 계속됐습니다. 하지만 1978년 최서면 박사(국제한국연구원장)가 야스쿠니신사에 있는 이 비를 확인한 뒤 북관대첩비 환국을 위한 범민족운동본부가 발족했고, 비문에 적힌 의병들의 후손들이 일본 정부에 청원서를 보내는 등 27년 동안 남북 각계의 반환노력이 잇따랐답니다.

그리고 2005년 10월 20일 한·일 양국은 ‘북관대첩비 반환 합의서’에 서명했습니다. 서명 후 8일 만에 한국에 도착한 대첩비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안치돼 일반인에게 공개되다 2006년 3월 1일 원래 있던 곳에 복원하기 위해 북한으로 전달되면서 100년 만의 귀향을 하게 됐습니다. 북한은 이를 기념하는 120원짜리 우표를 발행하는 등 귀환 축하 행사를 가졌다지요.

북관대첩비의 귀환은 민간 차원에서 이뤄낸 해외 유출 문화유산 환수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당사국의 입장이 있는 만큼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부분도 있거든요. 한·일 양국이 강제병합 100주년을 맞아 일본으로 반출됐던 ‘조선왕실의궤’를 반환하기로 합의한 사실도 오랫동안 전개해온 민간 차원의 반환운동이 결실을 본 것이랍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세계 20여 국가에 약탈 내지 불법으로 유출된 우리 문화재는 10만7800여점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지난 8월까지 환수한 문화재는 10개국 8100여점이랍니다. 최근에는 영구 임대 방식의 외규장각 도서 반환을 두고 프랑스와 갈등이 빚어지고 있습니다. 북관대첩비 반환을 교훈 삼아 원만하면서도 조속한 합의가 이뤄지기를 기대합니다.

문화과학부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