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노벨문학상 요사의 문학적 진수 ‘천국은 다른 곳에’
입력 2010-10-15 17:27
2010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74·사진)의 문학적 진수를 음미할 수 있는 소설이 출간됐다. 요사가 2003년에 펴낸 원숙기의 대표작 ‘천국은 다른 곳에’(새물결출판사)가 그것. 눈치 빠른 독자라면 요사가 책머리에 앉힌 인용문을 통해 소설의 주제를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들의 도움이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폴 발레리, ‘신화에 대한 짧은 편지’”
요사 문학의 두 축을 ‘정치’와 ‘인간의 관능성’ 탐구라고 할 때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는 19세기의 실존 인물인 플로라 트리스탕을 우리 눈 앞에 데려온 점이다. 프랑스의 광기어린 화가 폴 고갱의 외할머니인 플로라는 1884년 4월 어느 날 새벽 잠에서 깨어나 남프랑스의 오세르로 떠난다. 페루 식민지의 장교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안달루시아 아가씨’로 불린 그녀는 당시의 뭇 여성처럼 아무 권리도 없이 종처럼 살다가 문득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남프랑스로 향하는 것이다.
저 유명한 19세기의 ‘여성 체 게바라’의 탄생이 그것인데, 몸은 병들고 그녀의 나이 벌써 41세에 이르렀지만 지상에 남녀 차별이 없는 유토피아를 세우려는 불굴의 의지는 누구도 꺾을 수 없다. 플로라가 오세르 골목길에서 마주친 꼬맹이 계집애들의 ‘천국놀이’는 시종일관 소설의 바탕색을 채색한다. “‘이곳이 천국입니까?’ ‘아닙니다. 아가씨, 천국은 다른 모퉁이에 있습니다.’”(22쪽) 여자 아이 하나가 친구들에게 천국에 대해 물으며 이 모퉁이 저 모퉁이를 돌아다니는 ’천국놀이’는 프랑스에서도 페루에서도 아이들이 즐겨하는 놀이다. 페루 대통령 선거(1990)에서의 패배 이후 요사는 그의 작품에서 정치적인 것을 다루지 않았으나 이 소설에서 플로라의 행적을 통해 다시 정치적인 문제를 끄집어 낸다.
플로라가 남프랑스에서 홀로 노동운동을 전개한 지 약 50년 후 그녀의 외손자 폴 고갱 역시 가족과 아이들을 등지고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타히티로 향한다. 타히티에서 고갱이 만난 것은 질식할 것 같은 유럽 문명, 타락한 종교적 위선, 허위뿐인 예술을 한꺼번에 대체할 수 있는 대지의 원시성 그 자체였다. “바로 그날 밤, 일상의 장막이 찢겨져 내리고 그 뒤에 깊이 숨어 있던 삶의 일면이 모습을 드러낸 거야. 넌 그 삶의 일면을 통해 인류의 여명기로 옮겨갈 수 있었고 인류 역사에 첫발을 디뎠던 조상들과 만날 수 있었던 거야. 여전히 마술적인 신과 악마가 부대껴 사는 그런 세계로 들어갔던 거지.”(44쪽)
지상에 천국을 세우기 위해 세상의 끝을 선택한 플로라와 그녀의 외손자 폴 고갱의 삶은 소설 속에서 정교하게 교직된 정치와 예술의 이중주로 승화한다. 노벨문학상 수상 여부와 관계없이 수년 전부터 이 소설을 붙들었던 전문번역가 김현철씨의 감각적인 어휘 선택이 더욱 신뢰감을 준다.
정철훈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