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담 편지’ 펴낸 의사 박종두씨와 이희원씨 부부 이야기
입력 2010-10-15 17:33
여기는 병원이야. 왜 병원이냐구? 오늘 엄마랑 라온이가 조금 아파서 병원에 왔단다(라온 아빠).
라온아! 우린 함께 입원도 해본 사이네! 촬영이랑 파티랑 무리한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우리 아기가 ‘이제 그만 쉬어’ 하고 신호를 보냈어(라온 엄마).
지난 5월 15일 유산 기미가 보여 병원을 찾았던 이희원(34·랜덤하우스코리아 편집장)씨와 이씨의 남편 신효상(34)씨가 이씨의 뱃속에 있는 태아에게 쓴 편지다. ‘라온’이란 태명은 신씨가 아내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뒤 사전과 인터넷을 뒤진 끝에 찾아낸 순수한 우리말로 ‘즐거운’이란 뜻이다.
이씨는 “전에도 라온이에게 보내는 편지를 몇 통 쓰긴 했지만 이 편지를 쓰면서 태담 편지의 힘을 느끼게 돼 열심히 쓰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편지를 쓰는 동안 불안했던 마음이 가라앉으면서 “라온이에게 별일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고 했다. 신씨도 “편지를 쓰면서 라온이와 아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새삼 깨달았다”고 털어놨다.
이씨는 “임신한 뒤 공교롭게도 일이 부쩍 늘어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태담 편지 덕분에 일을 더욱 사랑하게 됐다”고 했다. 이씨가 태담 편지를 알게 된 것은 출판사 일 때문이다. 이씨는 임신하기 전인 지난해 가을부터 서울 신길동 성애병원 산부인과 박종두 과장과 함께 ‘태담 편지’ 책을 준비, 지난달 말에 출판했다. 이 책에는 산부인과 전문의인 박 과장이 1999년부터 모아 온 태담 편지 3000여통 중 고르고 고른 75통이 실려 있다.
저녁나절에는 바람이 제법 차게 느껴지던 지난 13일 오후, 이씨는 남편과 함께 성애병원을 찾았다. 이씨는 “공식적으로는 태담 편지 출판 뒤풀이고, 비공식적으로는 라온 아빠 교육(?)을 위해서”라고 했다. 박 과장은 신씨에게 ‘이것저것 숙제를 내줘 예비 아빠들에게 특히 인기 없는 의사’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남편들을 두어 번 소환합니다. 일단 임신 사실이 확인되면 미래의 아빠에게 태담 편지를 써서 같이 오라고 하죠. 또 임신 29∼30주에는 카메라를 갖고 함께 오라고 합니다.”
편지라고는 초등학교 때 국군장병 위문편지 쓴 게 전부일 30, 40대 남성들에게 아내 뱃속에 있는 태아에게 편지를 쓰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박 과장이 남편들에게 편지를 쓰게 하는 것은 엄마 혼자 오롯이 견뎌내야 하는 임신과 출산 과정에 남편을 참여시키고, 또 아이와의 첫 대면 때 들려 줄 멋진 말을 찾게 하기 위해서다.
박 과장이 태담 편지 숙제를 내주게 된 것은 1999년 7월 16일 제왕절개로 셋째 딸을 직접 받고 난 이후부터. “아이와 첫 대면 때 뭔가 의미 있는 말을 해주고 싶었어요. 소설 ‘뿌리’에서 쿤타킨테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해줬던 것 처럼요.”
박 과장은 그때 딸에게 “다른 사람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이 되라”고 말했다. 이후 다른 아빠들에게도 첫 대면 때 말할 기회를 줬지만 쑥스러워 그냥 웃기만 하거나 “사랑한다, 고맙다”가 전부였다.
“사랑과 감사, 그 말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좀 더 특별한 말을 들려준다면 나중에 멋진 추억이 되지 않겠습니까?”
태담 편지를 써와 아내에게 읽어 준 남편들은 아이와 아내에 대한 사랑을 확인했다며 감사의 인사를 건네는 것은 기본이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적지 않다. 물론 더러는 끝까지 나 몰라라 버티는 이들도 있단다. 박 과장은 태담 편지 숙제를 해낸 이들에게 이제부터 시작임을 강조한다고 한다. 아빠는 물론 엄마들도 태담 편지를 통해 태교를 하라고 정기검진 때마다 잔소리(?)를 한다는 것.
카메라 숙제는 동그란 배를 드러낸 아내와 남편의 사랑스런 모습을 박 과장이 직접 찍어주는 것이다. 남편이 아내의 배를 사랑스런 손길로 만지는 예쁜 사진을 500여장 갖고 있다는 박 과장은 앞으로 사진전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박 과장은 “태담 편지는 태교에도 좋지만 나중에 뜻하지 않은 덤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사춘기를 맞은 아이가 삐딱해져 부모를 밀쳐낼 때 태담 편지 모음을 보여 주자 마음 문을 열고 다가왔다며 감사인사를 전해 오는 부모들이 꽤 된다는 것.
“태담 편지를 읽고, 사진을 찍고…. 이런 일들이 자칫 두렵고 지루한 임신 기간을 즐겁게 만들어주는 것 같습니다. 저도 스트레스가 풀리고요.”
박 과장은 “둘째와 셋째 아이를 받는 일이 많아졌다. 의사들이 산모를 배려해 임신과 출산이 유쾌해지면 출산율이 조금은 올라가지 않겠냐”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는 요즘 태아의 첫 움직임을 감지한 날을 기억했다 아이에게 축하해주자는 ‘태동데이’ 숙제까지 내주고 있다.
모임이 파할 때쯤 박 과장은 라온 아빠에게도 숙제를 냈다. 라온이와의 첫 만남 때 무슨 말을 할지 꼭 생각해두라고. 라온 엄마는 “멋있는 말 기대한다”고 했고, 라온 아빠는 부담이 되는 듯 얼굴은 굳어졌지만 어느새 라온 엄마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김혜림 선임기자 ms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