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용의 공간 너머] 과거제와 천거제

입력 2010-10-14 18:08


‘1873년생. 1889년 알성문과 급제. 1891년 성균관 대사성, 1896년 학부협판(오늘날의 차관에 해당), 1902년 주 프랑스 특명전권공사.’

‘1872년생. 1900년 통신원 전화과 주사, 1901년 내장원 종목과장, 1902년 한성부 판윤(현재의 서울시장에 해당), 1903년 군부협판, 1904년 군부대신 서리.’

앞에 것은 당대의 세도가 민겸호의 아들이자 민영환의 동생인 민영찬의 약력이고, 뒤에 것은 순헌황귀비 엄씨의 조카 엄주익의 약력이다. 17세 소년으로 과거에 급제해 24세에 차관급으로 승진한 민영찬이나 과거제가 폐지된 뒤 29세에 미관말직으로 처음 벼슬길에 올라 초고속 승진을 거듭, 겨우 4년 만에 장관서리가 된 엄주익이나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어처구니없는’ 사례에 속한다. 얼핏 보기에는 과거에 급제한 민영찬이 그나마 ‘자격 시비’에서 벗어날 요건을 갖춘 듯하지만, 그가 ‘공정’하게 급제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문장을 잘 짓는 자를 거벽이라 하고,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을 사수(寫手)라 한다. 돗자리, 우산, 꽹과리 등의 기구를 나르는 자를 수종(隨從)이라 한다… 세도가와 부잣집에서는 출제관에게 미리 뇌물을 바치고 거벽과 사수를 사서는 대신 시험을 치게 한다. 좋은 자리를 잡아 먼저 답안지를 내기 위해 수종들을 부리니 과거 시험장이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예전에는 그래도 남의 글을 사는 값이 꽤 비쌌으나, 미리 시험관에게 뇌물을 바치는 것이 상례가 되어 글 값이 싸졌다. 형식만 대강 갖추면 되어 굳이 비싼 글을 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경세유표’ 중)

다산 정약용이 19세기 초의 과거장 풍경을 묘사한 내용이다. 뇌물과 연줄이 합격의 보증수표가 된 과거제는 더 이상 정당한 관리 등용제도가 될 수 없었다. 출제와 채점이 불공정하고 대리시험과 부정행위가 함부로 자행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다시 다산의 말을 빌리자면, 경륜과 지식이 탁월함에도 글을 꾸미는 ‘사소한’ 재주가 부족하거나, 단지 글씨를 잘 못 써서 버림받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평생을 과거 공부만 하다가 아무런 쓸모 있는 일을 하지 못한 채 머리만 허옇게 샌 사람들이 나오는 것은 오히려 작은 부작용이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과거제 개혁을 주장했다. 시험 절차와 출제 방식의 개혁을 주장한 사람도 있었고, 과거제를 폐지하고 대신 천거제(薦擧制)를 택하자고 주장한 사람도 있었으며, 두 제도를 병행하자고 한 사람도 있었다.

조선 후기의 과거제 개혁론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제가 폐지되고 ‘선거조례’와 ‘전고국조례’가 제정됨으로써 실현됐다. 관리는 칙임관, 주임관, 판임관으로 나뉘었는데, 칙임관은 총리대신의 추천을 받아 대군주가 직접 임명했고, 주임관은 각 아문 대신의 추천을 받아 총리대신이 대군주에게 보고한 뒤 임명했으며, 판임관은 각 아문 대신이 선발해 전고국의 시험을 거쳐 임용했다. 시험제와 추천제를 병행한 이 관리 임용 제도에 따라 대신의 권한이 커졌지만, 대신의 임기는 평균 6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대신들은 그 6개월간 자기 몫을 챙기는 데 바빴다. 정실 인사, 뇌물 인사가 횡행했고 관직은 한갓 죽은 뒤의 ‘묘비명’을 장식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심지어 황제 자신이 매관매직으로 황실 금고를 채우기도 했다. 임면권자는 자신인데, 대신들이 중간에서 사복을 채우는 것이 못마땅했음직도 하다.

현행 고시 제도의 폐단을 시정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 지 이미 오래다. 몇 해씩 고시 공부에 매달리다가 다른 일 할 때를 놓치는 우수한 젊은이들도 문제고, 일단 한번 붙으면 ‘철밥통’을 얻는 것도 문제다. 그런 점에서는 고시 외의 경로를 통해 공직에 접근할 길을 넓혀 주겠다는 지난번 행정안전부의 안을 마냥 잘못된 것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공정성’이다. 이 정부가 ‘공정한 사회’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자마자, 공교롭게도 공정성을 근본에서 훼손한 사례들이 까밝혀졌다. ‘돈과 빽’의 위세가 지금보다 훨씬 약해지기 전에는, 그리고 국민들이 그런 변화를 인정하기 전에는, ‘특채’가 정실 인사나 뇌물 인사와 동의어로 받아들여지는 상황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