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성균관 스캔들’ 원작자는 이제 얼굴을 보이시오!

입력 2010-10-14 18:09


10% 안팎의 높지 않은 시청률에도 열혈팬을 만들어내고 있는 KBS 2TV 월화드라마 ‘성균관 스캔들’. 드라마의 열기가 요즘 출판가에까지 번졌다. 2007년 나온 정은궐(필명)씨의 원작소설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 1·2’(파란미디어)가 대형서점 종합베스트 1∼3위를 오가며 메가톤급 히트작으로 떠오르고 있다. 후속작 ‘규장각 각신들의 나날 1·2’까지 합쳐 4권의 총 판매량이 100만부. ‘성균관∼’ ‘규장각∼’이 각각 60만부, 40만부다.

‘성균관 스캔들’이 로맨스 드라마이듯, 둘 다 로맨스 소설이다. ‘성균관∼’은 몰락한 남인 집안 장녀가 남장 여인으로 성균관에 거관수학하며 겪는 이야기. 시즌2에 해당하는 ‘규장각∼’은 과거급제 후 규장각에서 벌이는 에피소드가 중심이다. 소설은 사실(史實)을 끌어들여 팩션의 모양새를 갖췄다. 개혁군주 정조와 노론 세도가의 힘겨루기, 과거시험장 풍경 등 조선의 삶이 상세히 그려진다. ‘분발(分撥)’ ‘권지(權知)’ 같은 낯선 한자어는 지적 양념처럼 곳곳에 뿌려져 있다.

하지만 이런 액세서리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흔들리지 않고 로맨스 소설의 문법을 따라간다. 살을 발라낸 이야기 뼈대는 사랑이고, 사건은 착실히 해피엔딩을 향해 달려간다. 한국 독자에게 로맨스 소설은 ‘야하고 질 낮은 대본소 소설’로 인식돼 왔다. 1980년대 할리퀸문고의 기억 때문이다. 대중적 인기를 끈 작품도 드물었다. 그래서 로맨스 소설 ‘성균관∼’의 성공은 눈에 띈다. 저급장르로 천대받아온 로맨스 소설이 한국 출판시장의 중심무대에 진출한 것이다.

얼굴없는 로맨스 작가

작가 정은궐씨의 신원은 알려진 게 없다. 30대 후반 여성이고 전업작가가 아니라는 것 정도만 확인됐다. 작가가 나서길 꺼려서다. 출판사는 “본업이 따로 있다. 흔히들 좋은 직장이라고 부르는 곳에 다니는 것 같더라”고만 이야기한다. 찾는 곳은 많은데 작가가 싫다니 출판사는 애가 탄다. 그간 소설 배경이 된 성균관대에서는 강연을, 교보문고에서는 사인회를, 모 방송사에선 TV출연을 제안했다. 인터뷰 요청은 셀 수도 없다. 출판사는 이걸 죄다 거절했다.

임수진 파란미디어 편집팀장의 하소연이다. “5년 넘게 같이 일했지만 작가를 대면한 게 4∼5번밖에 안돼요. 계약서도 등기로 주고받았어요. 누구는 신비주의 전략이라고 하지만, TV 한번 나가면 책이 더 잘 팔릴 텐데 그럴 리가 있겠어요. 작가가 ‘유명해지고 싶지 않다’고 그래요.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다 거절한 거예요. 얼마 전에는 ‘모자이크 처리 하고 음성변조하면 (인터뷰해도) 되지 않겠느냐’고 농담하기도 했어요. 답답해서.”

로맨스 작가 중에는 정씨처럼 얼굴을 감추는 이가 꽤 많다. 비(非)전업 로맨스 작가들은 신원이 알려질 경우 본업에 지장을 받게 될까봐 걱정한다. 무엇보다 로맨스 소설 작가라는 문패가 부담스러워서다. 임 팀장이 부연했다.

“아는 로맨스 작가 중에는 포항공대 박사도 있었어요. 대기업 간부도 있고,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 교사, 학원 원장도 있어요. 대부분 여성이고요. 이런 분들은 알려지는 걸 싫어해요. 로맨스라는 게 개인의 내밀한 이야기이자 판타지 같은 거잖아요. 아는 사람이 읽으면 부모에게 일기장 들킨 기분이랄까. 정은궐 작가도 부모님이 읽으면 다시 글을 못 쓸 것 같다고 해요. 글 쓰는 ‘나’와 평소의 ‘나’를 분리하려는 것 같아요.”

바탕에는 ‘로맨스는 야하고 나쁜 소설’이라는 편견이 자리 잡고 있다. 박대일 대표는 경험담을 들려줬다. “제가 문예창작을 전공하고 오랫동안 로맨스 소설 전문 편집자로 일했거든요. 술자리에서 순수문학 하는 선배에게 ‘로맨스 소설이나 하는 주제에’라며 뺨까지 맞아봤어요. 로맨스 소설에 대한 사람들 인식이 그런 수준이에요.”

로맨스 소설과 드라마의 공생

영미권에서 로맨스 소설은 가장 파이가 큰 시장이다. ‘트와일라잇’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브리짓존스의 일기’ 등 영화로도 제작돼 인기를 끈 칙릿(chicklit·20∼30대 여성을 겨냥한 소설)도 로맨스 소설에 포함된다.

반면 국내에서 로맨스 소설은 B급 시장이다. 한 해 400∼500종이 쏟아지지만 대중의 관심권에 들어오는 작품은 극소수다. 대부분 만화대여점을 중심으로 기본 부수만 소화된 뒤 사장된다. 그나마 대여점이 몰락하면서 상황은 더 악화됐다. 캐롯북스 등 대형출판사가 의욕적으로 출범한 로맨스 전문 브랜드들도 최근 줄줄이 문을 닫았다. 양만 넘치고 정작 질이 독자의 눈높이를 맞추지 못한 것이다.

그나마 척박한 국내 로맨스 소설 시장에서 탈출구 역할을 해온 게 드라마였다. 동명의 드라마가 제작된 ‘내 이름은 김삼순’ ‘커피프린스 1호점’과 ‘경성애사’(드라마제목은 ‘경성스캔들’)는 드라마의 인기를 업고 주목받았다. 하지만 이건 예외일 뿐이다. 역시 관건은 이야기의 질이다.

박대일 대표는 “드라마 덕에 더 주목받고 있긴 하지만 ‘성균관∼’은 드라마 제작 전에도 이미 50만부 가까이 팔려나간 베스트셀러였다. 재미있는 건 누가 봐도, 어떤 장르여도 재미있는 것 아니겠느냐. 답이 거기에 있다”고 말했다.

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