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이런 사람이야”… 제주 월평마을 밴드 이야기
입력 2010-10-14 18:05
나는 백합을 기르는 남자다. 남자를 두 부류로 나눠 유부남이냐, 총각이냐 묻는다면 총각이다. 다시 노총각이냐, 그냥 총각이냐 한다면… 그래, 나 노총각이다.
제주도 서귀포시 월평마을에서 태어났다. 올레길 7코스가 끝나고 8코스가 시작되는 곳, 우리 마을은 따뜻하다. 감귤도 많고 백합도 많고 돌담도 많고 바람도 많다. 달의 테두리선과 비슷한 언덕에 마을이 둘러싸여 월평마을이라 한다.
평범한 농촌 총각인 내게 특별한 점이 있다면 지난해부터 마을 친구 6명과 밴드를 결성했다는 거. 이달 31일 공연이 있어 밤마다 백합 창고에 모여 악기를 퉁기고 두드리고 난리도 아니다. 나는 전자 기타를 친다.
지난 8일 여기자가 한 명 찾아왔다. 농부들이 밴드를 결성했다기에 서울서 왔단다. 당신은 꿈이 뭡니까, 참 뜬금없이 묻는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꿈? 사람이 몇이나 꿈을 갖고 살까요?
노총각, 밴드하다
꿈이라고 할 것까진 없지만 젊은 시절 바라는 건 있었다. 육지에 나가는 거. 딱히 할 게 있어서가 아니라 제주 사람들은 고등학교 졸업하면 육지에 갖다 와야 한다는 그런 게 있다. 신비감이라고 해야 하나. 스무 살에 집 떠나 서울, 부산에서도 살아봤는데 각박했다. 3년 만에 내가 태어난 물, 제주로 돌아왔다. 고향에 오니까 뭔가 탁 풀어지더라. 고향이 좋긴 좋은 거구나!
군대 갔다 와서 스물여섯에 자연스레 화훼업에 뛰어들었다. 국내 백합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월평마을이 담당하니까, 나는 그 마을에서 태어났으니까 당연히 꽃 키우는 사람이 됐다. 백합은 손이 많이 간다. 6월에는 씨앗 심고, 7월에는 구근(球根)을 캐 저온 저장고에 넣고, 8월에는 구근을 다시 밭에 심고, 11월에 수확. 1300평 관리하려니 일이 많다. 아내라도 있으면 모를까. 결혼? 안 한 게 아니라 못한 거다. 뜻대로 잘 안 됐다.
살다 보니 1, 2년은 훌쩍 지나갔다. 그러다 마흔하나가 됐다. 이곳엔 변화가 없다. 저녁만 돼도 마을이 컴컴하고, 돌아다니는 이도 없고 조용하다. 가끔 동네 친구들과 술을 마시는데 이젠 것도 싫증이 난다. 나다니는 걸 안 좋아해 쉴 때는 ‘방콕’해서 TV 보는데, 요즘엔 자꾸 이 마을 떠날 생각이 든다. 내게도 절실하게 변화가 필요하다. 그래서 궁리 중인 게 이사다.
지난해 6월 마을에 사업이 하나 들어왔다. 문화부 산하 단체인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에서 진행하는 생활문화공동체 사업. 문화소외 지역 주민들이 예술을 체험하도록 지원한단다. 동네 사람들은 반반이다. ‘활기가 생기겠구나’ vs ‘그게 뭔데? 무슨 도움이 되겠어’.
사업이 시작된 뒤 제주 예술인 모임인 문화도시공동체 ‘쿠키’ 회원들이 마을에 드나들었다. 미술가들이 마을에 살면서 작품 활동을 하는 공간 ‘월평 레지던스’, 다과를 나누는 ‘월평살롱’도 생겼다. 마을 입구 송이슈퍼에는 공공미술 작품이 걸렸고, 풍물놀이패도 생겼다. 마을 사람들이 함께 벼를 찧는 몰벵이 터(물방아 터)며 제주 똥돼지 기르던 전통 초가, 나쁜 기운 막는다는 아왜나무까지 우리에겐 일상인 사물이 그들에겐 문화고, 예술이란다.
재밌어졌다. 일상에 변화도 생겼다. 다만 허수아비처럼 끌려다니는 건 아닌지, 예술 하는 사람들이 후에 떠나버리면 마을이 더 휑해지지 않을지 간혹 의문이 들곤 했다. 그러면서도 난 악기 가르쳐준다기에 밴드에 가입했다. 악보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내가 과연 연주를 할 수 있을까. 나는 마흔한 살 농부, 기타리스트 강영철이다.
아빠, 밴드하다
나는 세 아이의 아빠다. 그리고 월평마을 일렉기타리스트다. 밴드 이름은 ‘울림 테우리’. 테우리는 제주말로 목동이란 뜻이다.
공연이란 게 참 묘하다. 놀랍다. 은근 중독이다. 지난해 10월 18일 첫 공연은 정말 잊지 못할 거다. 무대에 서니 조명이 우리만 비추고, 가슴은 떨리는데 머리는 멍하고, 어색하고. 처음엔 객석이 어두워서 사람이 없는 줄 알았다. 지금도 어떻게 연주했는지 모르겠다. 그냥 손이 움직이고 첫 곡 ‘나 어떡해’가 끝났다. 우와! 잘한다! 앵콜! 소리가 귀를 찌른다. 100여명 주민들이 하나둘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어? 되네? 우리가 공연을 한 거야?
“우리 이제 즐기면서 하자.” 녀석들에게 속삭였다. 멤버들도 서서히 얼굴이 핀다. 두 번째 곡 ‘빗속의 여인’이 시작되자 보컬은 이제 록커 신중현이 다 됐다. 관객에게 손을 펼쳤다 허리를 젖혔다 하늘까지 뛰어 오르느라 바닥에 발이 붙지 않는다. 나도 모르게 어깨가 들썩인다.
첫 공연. 무대에서 내려오자 솔직히 마음속으로 눈물이 나왔다. 다들 농부들이 무슨 밴드 하냐고 반신반의했는데. 온몸이 찌릿했다. 이런 걸 희열이라고 하나.
농촌 사람이 뭐 그리 바쁘겠냐 하지만 월평마을 청년회 임원에, 직장에, 밴드에, 애들 돌보는 일까지 요즘 너무 바쁘다. 밴드는 바쁜 내게 많은 시간을 요구한다. 그래도 밴드 하는 이유? 그건 밴드가, 음악이 내게 자유를 주기 때문이다.
아홉 살, 다섯 살, 세 살 애 3명 키우는 가장들은 알 거다. 감귤 농산물 산지 유통센터 직원인 내 월급으로는 아무리 아껴도 생활비가 늘 빠듯하다. 애들 대학까지 보내야 하는데 벌써 걱정도 들고. 소망이 있다면 땅 사서 귤 농사 지으며 직장도 다니는 거다. 6형제 중 막내인 나는 농부였던 부모님에게 땅을 받지 못했다. 음악 할 때면 이런 고민도 잠시 없어진다.
지난해 공연 끝나고 멤버 한 명이 그랬다. “우리 생활문화공동체 사업 끝나도 계속 해보자.” 나머지 6명이 다들 똑같이 대답했다. “당연하지, 안 하려고 했어요?” 나는 서른여섯 가장, 이한수다.
아줌마, 밴드하다
나는 제주 토박이 아줌마다. 네 살 딸이 있고, 넉 달 된 아이도 뱃속에 있다. 전셋값이 싼 곳을 찾다 2년 전 월평마을로 이사 왔다. 처음엔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았다. 집 주인 할머니는 나를 도둑으로 몰았다. 멸치며 쌀을 훔쳐갔단다.
소문은 무서웠다. 이사하려 했지만 한번 소문이 나니 이 마을에서 다른 전셋집 찾는 건 쉽지 않았다. 기억력이 좋지 않은 할머니 말만 믿고 사람들이 날 도둑으로 오해하는 듯했다. 친정어머니가 지금 살고 있는 주인집 아주머니에게 “우리 딸, 도둑 아니다” 설득해 겨우 이사했다. 지금껏 아무 문제없이 살고 있다.
택배업 하는 남편은 겨울이면 감귤 농사 짓는 부모님 도우러 시댁에 들어간다. 월평마을에서의 첫해 겨울, 남편 없이 딸과 둘이 반지하방에서 TV 보고, 밥을 먹었다. 추웠다.
지난해 8월, 마을에 문화 사업이 시작돼 악기를 가르쳐 준다는 소문이 났다. 교회에서 반주하는 나는 기타를 배우고 싶어 자원했다. 화훼업을 하는 강영철, 감귤 농산물 산지 유통센터 직원 이한수, 귤 농사 짓는 김동철(41), 택시 운전사 강남준(42), 건축사무실 직원 강경필(41), 취업 준비생 박진석(24)씨 이렇게 7명이 모였다. 우리에겐 프로젝트가 생겼다. 10월에 공연을 한다는 것이다.
“과연 가능하겠습니까?” 악기 선생인 기오타 소극장 강경환 대표가 우리에게 물었다. 나를 제외한 대다수 멤버들은 악보를 볼 줄 몰랐다. “에잇, 못하겠다!” 일주일에 두 번씩 모여 악보 보는 걸 연습할 때마다 종종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는 기타 배우러 갔다가 키보드를 맡았다. 오히려 강남준씨에게 건반을 가르친, 우리 밴드의 ‘수석’ 키보드 주자다. 악보에 적힌 콩나물 대가리를 읽고, 손가락 끝이 벗겨지도록 기타줄 튕기고, 그러다 보니 되긴 되더라. 음도 맞더라. 10월엔 마을 공동창고에서 첫 공연을 하고 올 8월에도 무대에 올랐다.
지난해 겨울은 따뜻했다. 처음엔 밴드 단원들에게 말 붙이기도 어려워 아저씨, 아저씨 하다가 나중엔 삼촌, 오라버니 했다. 남편도 밴드 단원들과 친구가 됐다. 난 연습 끝나고 맛난 거 먹으러 다니는 게 좋다. 통닭도 먹고, 삼겹살도 먹는다. 이런저런 이야기도 한다. 문화 사업이 마을에 들어와서 서로 뭉쳤지만, 우리 계속 가자. 진짜 이웃들에게 감동 주는 음악을 하자. 봉사도 다니고 실력이 쌓이면 올레꾼들 앞에서 공연도 해보자.
이달 31일에도 마을 공동창고에서 주민들 상대로 연주한다. 나 어떡해, 빗속의 여인, 넌 내게 반했어, 아파트, 아리랑, 사랑은 아무나 하나, 애국가까지 무려 7곡이다. 일주일에 두 번씩 연습하던 우리는 공연이 임박한 요즘 매일 밤 8시에 영철 오라버니네 창고에 모인다. 내 이름은 오은경, 서른한 살 아줌마다.
작가, 마을을 기웃거리다
나는 미술가 윤돈휘(37)다. 제주 토박이지만 서울서 작품 활동 하다 15년 만인 지난해 6월 월평마을에 공공미술 작업을 하러 갔다. 예술가네 뭐네, 어깨에 힘주고 다녀 봤자 누구도 뜨내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슬렁어슬렁 마을을 다녔다. 형들한테 말도 붙이고 동네일도 했다. 지난해 10월 4일인가, 영철 형네를 찾아갔다. 형은 백합밭에서 작업 중이었다. 일을 도왔다.
“형, 제가 서울에 있을 땐데요. 시나리오 대본을 300만원 받고 판 적도 있어요.” “너 시나리오도 쓰냐?” “제가 지금 생각해 둔 소재가 하나 있는데 형님 원하면 술 한 잔이랑 바꿀게요.” “뭔데?” “라이터요!” “알았다. 내가 사지.”
형은 배 한 조각과 맥주 한 잔을 주고 시나리오 ‘라이터’를 샀다. 장난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난 진심으로 판 건데. 노총각 영철 형은 요즘 기타 배우는 데 푹 빠져 있다.
월평마을 입구의 ‘송이슈퍼’. 동네 사람들도 여기서 놀다 가고, 올레꾼들도 이 슈퍼에서 먹을 걸 사서 다시 길을 떠난다. 미술이 뭐 따로 있나? 보는 사람에 따라선 송이슈퍼도 미술이 되고, 갤러리가 되는 거다. 슈퍼 출입문 옆에 백합과 한라봉 그려 넣고 차양막도 설치하고 의자도 갖다 놨다. 세상에서 제일 작은 갤러리, 송이슈퍼가 탄생했다. 그해 11월 작업이 끝나고 월평마을을 떠났다.
며칠 전, 12일쯤일 거다. 오후 3시까지 잠을 잔 나는 서울 마포구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었다. 기자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월평마을 송이슈퍼에 대해 이것저것 묻는다. 올레꾼들은 내가 만든 차양막 아래 의자에서 잘 쉬다 가고 있을까? 문득 월평마을과 사람들이 그립다. 영철 형! 지금도 밴드 해? 시나리오 ‘라이터’ 판 거, 장난 아니었어!
서귀포=박유리 기자 nopim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