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최복이 (5) 축복이 영원하리라 믿었던 사업이…
입력 2010-10-14 20:34
1992년 가을, 남편이 갑자기 잘 다니던 신문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하고 싶다는 폭탄발언을 했다. 일간신문 광고국에 잘 적응해 능력도 인정받고 제법 자리를 잡아가던 즈음이다. 둘째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을 때인데 부천에 작은 연립주택을 마련하고 큰 걱정 없이 소시민의 행복을 누리고 있었다. 대책도 없이 그만둔다니 선뜻 동의할 수 없었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연애 시절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생각났다. ‘구멍가게로 시작해도 좋으니 우리 힘으로 사업을 일으켜 보자.’ 대학 졸업 후 출판사와 학습지 사업에서 쓴맛을 봤지만 미련이 아직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날로 남편에게 그리 하라고 했다.
그때부터 나는 생계를 해결해야 했다. 학원 시간강사와 과외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학원에서 수업을 하고 있는 동안 세 살, 다섯 살짜리 두 딸은 엄마가 수업이 끝날 때까지 학원 앞 놀이터에서 기다렸다. 돌아오는 길에 김밥 몇 줄에 만두 한 접시가 늦은 저녁이 되기도 했다.
남편은 지인들과 함께 인삼 유통업, 통신판매업 등 몇 가지 사업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래도 남편은 늘 오뚝이 같았다. 아이디어도 많았다. 그러나 차마 생활비 얘기는 꺼내지도 못했다.
그렇게 가족 모두 지쳐가고 있을 때다. 늦게 귀가한 남편이 나를 잡고 눈물을 흘렸다. 너무 힘들다고, 죽고 싶다고. 그리고 너무 해보고 싶은 사업이 하나 있는데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더 이상 돈을 빌릴 자신이 없었다. 답답했다.
한 숨도 못 자고 새벽기도를 마친 뒤 남편을 깨웠다. 그리고 몇 천만원 되는 집을 팔아 하고 싶은 일을 해보라고 했다. 남편은 절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그날로 집을 내놓았다.
94년 서울 방배동 삼호상가를 얻어 남편이 하고 싶다는 순식물성 바디숍을 열기로 했다. 집은 근처 지하 월세방을 얻었다. 미안해하는 남편에게 ‘이참에 아이들이 강남에 와서 공부할 수 있는 좋은 점도 있으니 걱정 말라’고 했다. 돈이 부족해 공사를 하다 여러 번 중단하고 일하는 사람이 철수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가게 앞 육교에 올라가서 가게를 바라보며 눈물로 기도했다.
몇 달을 걸려 예쁘고 아담한 가게를 열었다. 부천 삼부제일교회 목사님이 오셔서 바쁘더라도 주일성수와 성경읽기, 기도생활은 꼭 하라며 믿음이 떨어질까봐 염려를 해 주셨다. 가게가 예쁘니까 지나가던 방송 PD가 우리 바디숍을 유망업종이라고 아침 인기 프로에 소개했다. 그것은 행운의 도화선이었다. 전국 주요 도시에 우리 바디숍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매장이 1년에 100개로 늘어나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젠 고생이 끝난 것만 같았다. 밤이면 바퀴벌레가 돌아다니던 집에서 넓은 집으로 이사했다. 통장도 여러 개로 나눠 관리했다. 남편은 카폰이 달린 고급 승용차를 샀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생각에 이젠 누리며 살고 싶었다. 모두 우리가 이룬 것이라 착각했다. 최소한의 감사와 적당한 기준의 십일조, 그리고 형식적인 예배 참여. 별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목사님의 염려대로 열심을 내던 신앙생활은 점차 소홀해지기 시작했다.
매장 수가 200개, 300개를 넘으며 회사가 급성장해 가고 있었다. 축복이 영원하리라 믿었다. 아이 업고 돈 빌리러 다니던 시절 성공하면 베풀고 나누는 삶을 살고 싶다고 열망하던 것은 기억조차 못했다. 그러나 마음껏 써보지도 못한 모든 것은 97년 예고 없이 들이닥친 IMF 구제금융 사태에 물거품처럼 사라져 갔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